공천혁명 잘 안 되는 이유


지난해 늦가을쯤만 해도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개혁'열풍에 휩싸였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지구당을 폐지하고, 후원회를 없애고, 상향식 공천을 하겠다는 것이 한 목소리의 공언이었다. '차떼기'라는 말이 유행되기 시작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불법정치자금이 드러나는 판에, 정치권은 너나 없이 부정(不貞)의 속곳을 들킨 아낙처럼 무참하던 그때였다. 오랫동안 피떡이 되어온 정치권의 어두운 이미지 때문에 아주 믿어줄 낙관은 아니었어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정치판의 변모를 꿈꾸었었다.

그런데, 막상 17대 총선을 저 만큼 앞둔 지금, '혹시나'했던 기대는 아쉽게도 '역시나'하는 실망으로 귀결지어지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상향식 민주주의'..... . 정치개혁을 갈구해온 민초들을 들뜨게 했던 그런 순박한 희원들을,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소박한 기원을 기억하는 마음이 아찔하다. 막상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유권자들은 이 안타까움을 어떻게 삭여낼까. 그리고 그런 심사가 어떤 결과를 빚어낼까, 궁금한 마음 아무리 깊어도 그 끝을 예단하기란 쉽지 않다.

공천혁명, '혹시나' 했던 기대 '역시나'로 귀결

기획공천, 낙점, 밀실공천, 낙하산공천 따위, 이젠 정말 사라질 줄 알았던 말들이 다시 횡행한다. 가깝게, 대전 충청권만 해도 그렇다. 자민련은 아예 경선 같은 것은 꿈도 안 꾼다. 비공개로 출마희망자들을 끌어 모으고, 자체 심사위원회에서 신청서류를 주무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애초부터 '경선'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던 자민련 이야기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경선 방침을 밝히면서 '상향식 민주주의'를 천명해왔던 한나라당·민주당·열린우리당이 말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중앙당에서 이영규 전 검사를 단수후보로 공천 결정한 한나라당 대전서갑의 경우, 경선을 준비해온 출마예상자들과 지구당 관계자들이 '탈당'카드까지 내보이며 반발을 계속하고 있다. 당사자인 이영규씨는 지난 일 주변 사례들까지 갖다대며 '개혁공천'임을 주장한다. 열린우리당의 대전대덕구·대전서을의 경선도 갈 길이 멀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고, 충남지역에는 경선을 준비해온 지역인사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어 '낙하산 공천이 될 경우 열린우리당을 아예 포기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나온단다.

'낙하산 공천'에 대한 지역의 거센 반발 계속돼

이번 총선을 '올인'전략으로 필승해야 할 이유가 너무나 충분한 열린우리당이 30% 내천 규정을 만들어 시작했다는 총선후보 막판조율은 간단치 않은 풍랑을 예고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경기에서, 대타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라면 고민이 깊은 것은 당연하다. 사표를 낸 김진표 부총리에 대한 수원팔달구의 당원들이 분기를 높여가고 있단다. 권기홍 노동부장관이 노리는 경북 경산·청도,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이 뛰어들 충북 제천·단양도 당원들 분위기가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한때, 상향식 공천을 장담했던 정치권이 막상 판이 벌어지고, 저 만큼 경기장이 보이는 시점에 이르러서 대오가 일부 흐트러지는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고급 카드'를 '민주주의 카드'보다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2등은 꼴등이나 마찬가지인 총선의 독특한 속성을 감안한다면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 낙하산공천을 꾀하는 정당간부들의 이론이다. 맞다. 맥없이 나자빠질 게 너무나도 뻔한 게임을 앞두고 넋 놓고 나아가는 것은 돈키호테적 만용일 수 있다.

국민들 우습게 보는 작태, 유권자 선택 궁금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긴 세월 군사독재정권의 압제에 퍼렇게 멍들어온 민초들의 '상향식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진작에 눈귀로 보고 들은 정치인들이라면, 결국 이번에도 이 지경의 판을 만들어 놓은 죄는 너무나 크다. 지난해 늦가을 그때부터라도 상황을 충분히 예정하고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한다. 선거 한 두 달을 앞두고 빅뉴스 핫뉴스 만들어가며 오색낙하산 태워 내려보내는 이 신물나는 짓거리를 또 보아야 하는가. 머리채 멱살 잡고, 마이크 쟁탈전 벌이는 일에나 골몰해온 그 세월이 허망하지 않은가 그 말이다.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작태다. 아니, 유권자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현상을 간파하고 얕잡아본 구태의연한 잔꾀정치의 단면이다.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실이나 한해야 할 것인가. 1등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총선, 어느 당이든 패배는 곧 사멸로 이어질 공산이 큰 '사생결단' 판이 되어버린 정치권 저간의 사정을 용서해야 할 것인가. 정치인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 못지 않게, 4월 유권자들의 선택이 점점 더 궁거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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