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 행정’의 끝은 어디인가

  김학용 주필  
 김학용 주필

대전도시공사는 대전시 산하 지방공기업이다. 부시장이나 국장을 하다가 이런 지방공기업의 사장이나 임원으로 옮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기업 임직원들은 경력이 비슷한 공무원보다 보수가 훨씬 높고 신분도 보장된다. 그런데도 공무원들은 공기업으로 옮기는 것을 꺼린다. 퇴직을 앞두고 밀려나듯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가 있다. 지방공기업은 자치단체에 대해 철저한 을(乙)이다. 시청에서 부시장 국장을 지냈어도 지방공기업 사장으로 옮기면 한참 아래 부하였던 직원까지 상관처럼 모셔야 하는 입장으로 바뀐다.

대전시에 대해 철저한 을(乙), 도시공사

대전도시공사도 뭐든 대전시가 시키면 해야 하는 확실한 을(乙)이다. 200~300만원 짜리 언론사 광고조차 대전시에서 ‘안돼!’ 하면 집행하지 못한다. 그런 도시공사가 2700억원 짜리 사업 계약을 자기 맘대로 했다가 ‘사고’를 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도시공사는 유성복합터미널 사업 협약을 열흘이나 기한을 넘겨 체결했다. 대상은 계룡건설이 포함된 현대증권컨소시엄이다. 엉터리 협약을 하니까 후순위였던 업체가 소송을 내며 반발하고 있다.

이 사건을 ‘어설픈 계약’이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보기도 한다. 도시공사의 ‘실수’ 쪽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필자가 보기엔 누군가를 위한 도시공사의 ‘고의적 자책골’이다. 도시공사가 관련 규정이나 기한을 깜빡했다가 빚어진 자체 실수는 아니다.

도시공사는 ‘최고(催告) 기간’을 적용해 협약 시한을 열흘이나 늦췄다. 공직 경력 30~40년의 공무원들에게 물어보니 한결같이 공공기관 계약에서 최고 기간을 적용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는 반응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최고’는 두 계약 당사자가 일단 계약은 했으나 한 쪽에서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상대방이 “앞으로 며칠을 더 줄 테니 계약을 하든지 말든지 최종적으로 선택하라”며 주는 기한 연장이다. 민간계약에서나 있을 수 있지, 엄격성을 요구하는 공공기관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 협약’은 실수 아닌 사주에 의한 ‘자책골’?

도시공사가 우선협상 대상자인 현대증권컨소시엄과 계약을 하든지 말든지 결정해야 하는 기한은 작년 12월 27일이었지만 그날까지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도시공사는 현대증권 측과의 협약은 물건너갔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그러나 도시공사는 ‘최고 기간’이란 아이디어로 현대증권측을 되살려냈다.

법적으로 ‘최고 기간’이 인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도시공사는 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낸 것인가? 디트뉴스 보도대로 현대증권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는 계룡건설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이번 협약에 실패하면 계룡은 앞으로 2년 간 대전시 사업에 일체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업으로선 심각한 문제다.

도시공사가 이런 상황을 뒤늦게 알고 ‘계룡 구하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계룡건설은 향토기업이니 편의를 봐줄 수는 있다. 혹시 도시공사가 이런 식으로라도 해서 협약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면, 협약의 효력은 없더라도 사업자(계룡건설)에게 면책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향토기업을 도와주려는 가상한 뜻은 알겠으나 기상천외한 수법까지 동원하는 데는 향토기업 살리기 '명분' 이상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가 도시공사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공사 ‘계룡 구하기’ 진짜 자문해준 사람은..

2700억원 대나 되는 사업 계약을, 더구나 억지 수법의 계약을 도시공사가 자의적으로 벌인 일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도시공사 측은 변호사 자문만 받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변호사가 실제로 그런 황당한 자문을 해줬는지도 의문이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도시공사가 따를 수밖에 없는 진짜 ‘자문기관’의 허락이 없었다면 변호사 자문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최고 기간’이라도 적용해보라고 말해준 진짜 '자문기관'은 어디였을까? 누가 무슨 이유로 불법적인 협약까지 사주했을까?

도시공사의 갑(甲)인 대전시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전시는 협약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감사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시와 도시공사의 관계로 보면 시 스스로가 자유로운 입장이 아니다. 대전시 감사가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 ‘면죄부’만 줄 가능성이 높다.

이 헙약이 효력을 가지려면 법적 당사자인 도시공사와 현대증권컨소시엄의 도장이 필요하고, 대전시장도 입회인으로 도장을 찍어야 한다. 염홍철 시장이 ‘최고 기간’ 적용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 도장을 찍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찍으면 된다. 대전시는 감사에 앞서 ‘최고기간’ 적용을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시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대전시가 도시공사와 같은 입장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최악 상황까지 이른 대전시의 비정상 행정

이번 협약이 최종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면 ‘불발’로 끝나겠지만 의문스런 과정에 대한 진상은 밝혀져야 된다. 단순 실수가 아닌 이상 공공기관의 신뢰를 크게 훼손시킨 고의적 사고다.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밝혀야 한다. ‘최고 협약’ 건은 대전시의 행정이 최악(最惡)의 상황까지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징표다. 이 정도면 감사가 아니라 수사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비정상적 계약은 이뿐 아니다. 대전마케팅공사가 118억원을 건넨 꿈돌이랜드 매입도 특혜의혹을 사면서 시민단체가 검찰에 고발해 수사가 진행중인 상태다. 대전시의회 김경훈 의원도 마케팅공사가 40억원 정도는 더 주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꿈돌이랜드를 비싸게 팔아넘긴 업체는 그러고도 비품값 2억5천만원을 별도로 요구하는 소송을 대전시 측(대전마케팅공사)에 냈다. 판사는 "피고(마케팅공사)가 보통 소송 같으면 적극적으로 다투는데 여기는 다투지도 않고 답변도 않고 피고의 태도가 특이하다"고까지 했다.

대전도시공사와 대전마케팅공사의 공통점

대전도시공사의 ‘최고(催告) 아이디어’나 대전마케팅공사의 ‘특이한 재판 태도’는 별개가 아니다. 모두 대전시를 갑(甲)으로 모시는 을(乙)로서 보이는 공통된 ‘비정상적 행태’다. 지금 대전시에 이런 ‘비정상’이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지 알 수 없다. 유성복합터미널은 밖으로 드러난 좀 커다란 ‘비정상 사건’의 하나라고 본다. 이 사건은 이해 당사자가 있고, 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갖는 사안이어서 세상에 그 일부가 드러난 것이다.

대전시가 금고동에 추진하는 자원순환단지 사업에도 의문점이 적지 않다. 2000억원 정도 소요되는 이 사업은 대전시민들이 배출하는 각종 생활쓰레기를 활용해서 전기와 열을 생산하는 친환경 사업이다. 쓰레기도 처리하면서 돈도 버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다. 다른 시도들도 다투어서 하고 있다.

문제는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지금 이 사업은 대기업 계열인 G사 중심의 컨소시엄이 단독으로 사업을 신청하고 대전시가 이를 수락해서 추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업비를 민간업체가 일부 대고 정부와 대전시가 나머지를 지원하는 민간투자(민투) 방식이다. 

2000억원대 자원순환단지 사업도 밀실 추진

민간 자본을 활용할 수 있어 한때 정부가 재정난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권장했던 방식이다. 그러나 민투사업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근래엔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전시에 큰 부담을 안겼던 갑천천변고속도 건설도 민투방식이었고, 말썽을 빚은 ‘서울지하철 9호선’ 등도 민투사업으로 건설된 것이다.

민투 방식은 대체로 단독 협상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사업자간 공개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커다란 단점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제3자 공모라는 경쟁의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사실상 단독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사업이 ‘어둠 속’에서 진행되기 마련이다.

자원순환단지 사업은 사업비가 2000억원이 넘는 대규모 사업인 데도 대전시가 진행 과정에 대해 보도자료를 낸 것은 수년 동안 한 차례뿐이다. 시시콜콜한 사업도 몇 번씩 보도자료를 내지만 자원순환단지 사업에는 딱 한번만 냈다. 신문 공고도 내면서 법적 하자는 없게 진행하고 있지만 환경단체도 그 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다.

고은아 대전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친환경 기술의 적합성 여부 때문이라도 자원순환단지 사업에 참여해야 할 입장이지만 대전시에선 아무런 설명도 자료도 주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근수 대전시의회 산업건설위원장도 “(기술 문제가) 아직 불안정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음에도 시의회 설명 및 충분한 소통과 사회적 합의 과정이 생략된 채 시가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 정상화 외치지만 계속되는 ‘비정상’

민자 방식인 유성복합터미널은 ‘최고 기간’이란 황당한 조치에 이 사업의 경쟁 업체가 소송을 내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비밀작전 하듯 진행되는 자원순환단지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민들은 알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올해 신년사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쳤지만 비정상 행태는 계속되고 있다. 사업계약에 ‘최고(催告) 기간’이란 듣도 보도 못한 억지 수법은 정상적인 조직에선 나오기 어렵다. 어둡고 컴컴한 조직에서나 가능하다. 도대체 대전시의 비정상 행정의 끝은 어디인가? 개선을 위해선 도시공사 ‘최고 계약건’의 전말을 제대로 밝히는 것부터 필요하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