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리뷰<43> | 서독차관 ‘1억5000만 마르크’의 비밀

   
 

99% 언론, 사실 확인 없이 ‘우상화’에 골몰

2억불 차관협의,  5.16 후 오히려 ‘축소’

독재미화세력 상층 장악, 사실은 극소수 유통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방문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확히 50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일(서독)방문 일화 때문이다. 대다수 언론, 아니 거의 모든 언론이 부녀(父女) 대통령의 독일방문에 대해 스토리텔링 경쟁을 벌였다. 그 핵심 내용은 이렇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정부가 제공한 민간항공기를 타고 홍콩, 뉴델리, 로마 등 6군데를 경유한 끝에 28시간 만에 서독에 도착했다. 서독의 정관계 인사들을 설득한 끝에 차관 1억 5000만 마르크를 빌려왔다. 이 돈은 한국의 경제성장 즉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공영방송부터 시작해 종합편성채널, 중앙일간지는 물론 경제지와 지방지까지. 서사의 전개방식만 다를 뿐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보도했다. 일부 진보매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과도하게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보도를 냈을 뿐, 사실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언론은 없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독차관 1억 5000만 마르크(약 3500만 달러) 유치 신화는 사실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는 축에도 못 끼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박정희 서독방문, 차관논의 없었다

1964년 12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방문 기간 내내 1면 머리기사를 할애해 상세한 보도에 나섰다. 그해 12월 8일자 보도에서 신문은 “朴대통령 본에 도착. 어제 하오 5시 40분 뤼브케 대통령이 영접, 거리엔 태극기 물결” 제목의 보도를 내보냈다. 이튿날인 9일자 신문에서는 “한·독 정상회담. 국토통일-경제협력을 논의, 한국의 발전 적극 지원, 오늘 에르하르트수상 만나고 공동성명” 등의 내용을 가장 비중 있게 다뤘다.

당시 한독 정상회담에서 ‘1억 5000만 마르크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협의됐을까. 그러나 기사엔 “박 대통령이 서독 뤼브케 대통령과 약 1시간에 걸쳐 정상회담을 벌였다”는 간략한 내용만 소개됐다. 두 정상이 어떤 선물을 주고받았는지, 회담장 분위기가 어땠는지만 상세하게 소개됐을 뿐이다.

다음날인 10일자 신문에는 박 대통령과 서독 에르하르트 수상의 회담 내용이 실렸다. 당시 <조선일보>는 ‘에르하르트 수상, 한국경제발전에 큰 관심’이라고 썼다. 그러나 기사엔 “에르하르트 수상이 한국경제자립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급한 내용만 간략하게 소개했을 따름이다.

서독 대통령과 수상을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의회를 방문한 뒤 개별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11일 파독 광부들을 만나고 교포들과 조찬을 함께했다. 이후 베를린 공대에서 연설하고 뮌헨에서 공관장회의를 주재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기간, 차관제공에 대한 내용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승만 정권부터 서독차관 논의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로 읍소해 서독의 재정원조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일까. 4·19와 5·16 등 역사적 격변기였던 1960년 전후 서독차관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 내용을 추적해 봤다.

사실 서독의 재정원조는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시절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1958년 10월 23일 서독의 경제상 일행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한국정부가 처음으로 차관요청을 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게재됐다.

본격적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0년부터였다. 4·19혁명 이후 수립된 과도정부, 즉 장면 정권이 독일에 조금 더 적극적인 구애작전을 펼쳤다. 1960년 12월 장면 정권의 태완선 부흥부차관은 원조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날아갔다. 귀국 후 그는 “서독의 재정원조(차관도입)가 거의 확실하다”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4개월 뒤인 1961년 3월, 칼 뷰겔 주한 서독대사는 2억불 차관제공 용의가 있다고 한국정부에 알렸다.

장면 정권의 성과, 계승은 커녕…

그러나 2개월 뒤 5·16군사 쿠데타가 벌어지고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은 장면 정권이 이뤄놓은 ‘서독의 2억불 차관제공’ 성과를 제대로 계승했을까. 백방으로 노력하긴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의장이 이끄는 쿠데타 정부는 천병규 재무장관을 독일로 파견했다. 천 장관은 귀국 후 “서독이 차관제공에 열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1961년 10월부터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한국의 차관요청액은 1억 5000만불. 서독이 장면 정권에 약속했던 2억불에 훨씬 못 미치는 규모였다.

협상결과는 더 참담했다. 8명의 정부교섭단이 매달렸으나 서독이 제공한 장기차관 규모는 3750만불에 그쳤다. 1961년 12월 14일 서독정부의 발표를 인용한 <조선일보> 보도내용 그대로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과 독일정부간 경제협정을 체결하고 재정원조를 확약 받은 것은 3년 뒤인 1964년 12월 5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1면엔 ‘한·독 경제협정 체결. 어제 박충훈 상공-서독정부 사이에 가조인, 재정원조 3천9백여만불’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튿날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정원조를 받기 위해 서독으로 향했고, 눈물로 읍소해 차관을 얻어온 뒤 한국의 경제발전 초석을 놓았다는 신화는 처음부터 ‘소설’이었다는 의미다.

 “독일에 얽힌 박정희 신화는 허구”

증언자도 존재한다. 1960년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하는데 산파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수길 박사는 “독일에 얽힌 박정희 신화는 허구”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지난 2006년 기자협회보 인터뷰를 통해서다.

“독일 차관은 1961년 12월 재건 차관 명목으로 집행됐습니다. 1억5천만 마르크였죠. 그런데 이건 장면 정권 때부터 추진된 겁니다. 재건 차관은 한국을 포함해 32개 약소국에게 지급됐습니다. 1억5천만 마르크 중 7천5백만 마르크는 현금 무이자로 빌려줬고, 나머지는 독일에서 재건에 필요한 물품을 사가는 대신 재정을 보증해주는 형태로 지급됐습니다. 그러니 별도의 담보나 보증이 필요 없었죠. 광부와 간호사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받았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 왜곡’은 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확산되는 것일까. 기자가 벌써 몇 차례나 인용했던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지적을 또 한 번 인용한다.

“박정희 미화 세력이 사회의 상층부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적 사실과 논리는 극소수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다 끝날 뿐이다.”

김재중 기자 jjki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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