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 ‘새정치’의 역습

이번에도 변죽만 울리다 끝날 일이라 생각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이야기다.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이 맞았다.

지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모두 이구동성으로 기초선거 무공천을 약속했다. 그 배경에 안철수 후보가 브랜드화한 ‘새정치’가 있다. 기초단체장(시장·군수·구청장)과 기초의원(시·군·구의원) 선거의 공천을 사실상 국회의원이 좌우하다보니 부작용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전략적으로 ‘좌클릭’이 필요했던 박근혜 후보도, 개혁적 이미지에서 안철수에게 뒤질 수 없었던 문재인 후보도 ‘새정치’ 물결을 탈 수밖에 없었다. ‘새정치=기초선거 무공천’이란 공식이 성립된 셈이다.

사실 기초선거 무공천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30년 만에 지방자치가 부활한 후 1991년 3월 26일 치러진 기초의회 선거는 무공천으로 실시됐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기초의원 무공천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자당 당론이었다.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인적자원이 넘쳤다. 무공천 선거는 공천탈락 부작용을 막을 수 있고, 인물중심 선거가 돼 친여성향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셈법이 작용했다. 반면 평민당은 정당공천을 주장했다. 호남에 국한됐던 평민당으로선 전국 정당 발돋움을 위해 철저히 여야 대결구도를 원했기 때문이다.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지방선거에서도 기초선거 무공천이 다시 쟁점이 됐다. 민자당 주류였던 YS(김영삼 전 대통령)계의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축출이 자초한 지역분할 구도, 구(舊) 민정계와의 주도권 다툼 등이 정치적 배경이었다. 이 때 YS계가 꺼내든 카드가 지방행정구조 개편이고, 기초선거 무공천을 골자로 한 통합선거법 개정이다. 지방자치 부활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생각한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민주당에 있어 ‘무공천=민주주의 말살’이었다. 대치정국을 풀기 위해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가 중재하고 여야가 합의한 ‘반반(半半) 선거’, 즉 ‘기초단체장 공천, 기초의원 무공천’은 그때부터 2002년 3회 지방선거까지 이어졌다.

2006년 5·31지방선거부터는 기초의원까지 정당 공천이 허용됐다. 기초의원들에 대한 국회의원의 노골적인 장악력 높이기 의도였다. 그러자 ‘공천헌금’ 등 비리가 불거지고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휘둘리는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2010년 6·2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여야가 ‘정치개혁’을 화두로 머리를 맞댔지만 정당공천제는 유지됐다.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아서다.

지난날을 돌이켜봐도 공천이냐 무공천이냐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공천을 가지고 ‘갑질’을 하는 ‘구정치’가 문제고, 중앙정치에 예속된 지방자치가 문제다. 무공천은 새정치의 전제도 아니다. 민주당과 ‘안철수’의 합당배경만 놓고 봐도 그렇다. 새정치 할 사람이 모이지 않았던 게 첫 번째고, 박근혜정부 중간평가라는 선거프레임이 통하지 않았던 게 두 번째다. 내가 아는 한 어느 선진국도 무공천을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정당 책임을 강조하고 있어서다. 공천이 민주주의라는 대의에도 더 가깝다.

공천, 무공천을 가지고 다툴 게 아니라 20%의 예산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는 중앙으로부터 ‘돼지여물통정치’의 노예로 전락한 지방을 구하는 게 진짜 ‘새정치’다. 답은 지방분권이다. 국가시스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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