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 안 지사의 과제

  김학용 주필  
 김학용 주필

안희정 지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는 모진 말이 없다. 상대를 무시하고 화나게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대화와 타협, 단결과 화합을 강조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갈등과 분열을 중단하고 낡은 정치를 청산하자고 주문했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자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야당 정치인의 입에선 좀처럼 나오긴 힘든 말도 한다. 김대중과 박정희를 나란히 놓고 둘 다 ‘공칠과삼’으로 평가한다. 노무현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앞선 지도자들을 너무 쉽게 비판만 한다”며 “김대중 노무현 박정희 이승만 등 과거 대통령들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주장한다.

정치 스승 노무현과 차별화 ‘착한 정치’

그는 보수 진영에서도 수긍할 만한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진보 진영 정치인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진보 진영에선 못마땅하게 여길 만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놓고 문제를 삼을 만한 말은 별로 없다. 진보 보수 양쪽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상식적인 말이 많다. ‘중간 지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도 탓할 바는 아니다. 정치는 현실적으로 부동층을 잡는 게임이다.

안희정의 말은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가 대선주자가 된다면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안철수 문재인과도 구별되는 점이다.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안철수의 언사는 이제 여느 정치인과 다를 게 없다. 문재인도 ‘세월호를 또 하나의 광주’라고 오버하는 실수를 범했다. 대선 패배 이후 닥쳐온 모진 환경이 문재인을 ‘분노의 정치인’으로 만들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안희정의 정치적 스승 노무현도 분노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분노로 집권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하고 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안희정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화내거나 목청을 돋우는 일이 거의 없다. 그는 노무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 노무현과의 차별화이면서 스승을 넘어서는 방법이기도 하다.

안희정 박원순 남경필 원희룡 소통 경쟁

현실정치에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멀리 보는 정치인들에겐 분노와 공격의 ‘분노의 정치’보다 대화와 타협의 ‘착한 정치’가 대안일 수밖에 없다. 안희정은 누구보다 이를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는 박원순과 야당에게 연정(聯政)을 제안하는 남경필 원희룡도 ‘착한 정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들 ‘소통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한다. 누가 더 대화와 소통을 잘하는지 시합하는 중이다. 안희정도 열심히 ‘착한 정치론’을 설파하고 있다. 책에서 인터뷰에서 특강에서 주장하는 ‘착한 정치론’은 진심일 것이다.

문제는 ‘착한 정치’의 현실성이다.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아무리 대화와 소통을 외쳐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성과를 내기 어렵다. 대화를 입에 달고 살았던 안희정도 민선 5기 때는 여소야대 도의회와의 불통 때문에 고생했다. 책임이 어느 쪽에 있든 도민들이 보기엔 불통일 뿐이다. 만일 안희정이 대권을 잡는다면 국회와 어떤 식으로 소통할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도의회에도 여소야대가 되었다. 안희정은 착한 정치를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이란 점을 보여줬으면 한다. 착한 정치를 내걸고 대권에 도전한다면 꼭 이뤄내야 할 첫째 과제다.

도정(道政), 대권으로 가는 실험장은 아니다

당부하고 싶은 게 또하나 있다. 안 지사는 도정(道政)을 대권으로 가는 데 필요한 실험장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는 일부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풀어야 할 과제를 지방정부차원에서 실천하고 도전정신으로 실험해 희망과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실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때 대권에 도전하겠다. 지난 4년간 실험했고 어느 정도 가닥을 잡고 있다”고 했다. 정말 ‘실험’이란 표현을 썼어도 취지가 그런 뜻은 아니겠으나 중앙정부의 일을 지방정부가 실험하는 식이면 안 된다.

민선 5기에는 3농혁신 지방분권 행정혁신 3대과제에 힘을 쏟았다. 행정혁신은 시스템 변화를 유도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나머지 2가지는 성과가 미흡했다. 이 때문에 지난 선거에서 안 지사는, 상대가 민선5기의 미흡한 실적을 물고 늘어지자 고생깨나 했다.

중국이 세계경제의 한 축이 되면서 환황해권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에 대비한 계획을 구체화해서 추진해야 할 책무가 안 지사에게 있다. 환황해권을 선도할 물류체계를 구축하고 배후가 될 내포 신도시를 육성하는 일은 도지사의 중대한 임무다. 지난해 하반기에야 환황해권 미래발전전략을 내놓았으나 얼마나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전직 관료들은 안 지사가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고유명사'보다 '보통명사' 많이 쓰는 안 지사

안 지사를 주인공으로 해서 생산되는 기사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안 지사의 말에는 ‘서해안’ ‘환황해권’ ‘내포’ 같은 고유명사보다 ‘정의’ ‘민주주의’ ‘대화’ ‘갈등’ ‘지역구도’ 같은 보통명사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다. 3농혁신 지방분권 행정혁신도 고유명사는 아니다. 고유명사는 충남도의 고유 업무에, 보통명사는 전국 공통의 사안에 쓰는 말이다. 정의와 민주주의에 더 관심을 두면 서해안 개발과 내포신도시 발전은 늦어지게 돼 있다.

그제 도지사에 당선된 뒤 가진 첫 직원조회에서도 화두는 보통명사인 ‘정의(正義)’였다. 공직자는 국민 모두가 억울함이 없도록 사회적 정의를 생산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요지의 특강이었다. 3농혁신도 궁극적으로는 농어업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했다. 민선 6기에도 이 시대가 안아야 할 정의라는 가치를 가지고 정책과 사업들을 풀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런 내용의 특강은 유튜브에 올라가고 전국의 네티즌이 본다. 이 동영상을 눌러본 한 네티즌들은 “이 사람 볼수록 괜찮네... 크게 될 사람” “역시 똑부러지네” 같은 안 지사 칭찬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심대평 이완구가 추진해온 행정을 인정하는 공무원들에겐 안희정 식의 조회가 마뜩찮다. 그들은 안 지사에 대해 도정 목표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충남지사에겐 ‘정의’나 ‘민주주의’보다 ‘서해안’이나 ‘내포’가 더 시급한 게 정상이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는 정의와 민주주의는 한시도 소홀히할 수 없는 가치지만 현직 도지사에겐 서해안 홍성 예산 천안 아산 부여 청양 논산 서천 공주 금산 같은 말이 더 입에 붙어야 되지 않을까? 도지사한테 정의와 민주주의 같은 보통명사들만 자꾸 튀어나온다면 충남도는 대권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도지사의 ‘실험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착한 정치' 실천 능력 보여주길

안희정의 ‘착한 정치’에 대한 의지는 의심치 않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지도 보여줘야 한다. 여소야대의 도의회는 안희정의 ‘착한 정치 실험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정이 대권으로 가는 실험장이나 수단이어선 안 된다. 안 지사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아니겠지만, 도 공무원 중에는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선 6기에는 착한 정치 실험을 제대로 해보면서, 도정에도 큰 성과를 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도지사가 대권으로 가는 떳떳하고 정의로운 길이다. 늦었지만 안 지사의 재선을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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