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정명(正名) 필요한 대전시와 혜천대

‘명실상부(名實相符)’란 이름과 실상, 또는 이름과 실제가 부합한다는 뜻이다. 자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는 건 안 될 소리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있었다. 위나라 출공(出公)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겨 제사를 지냈다. 아들 출공과 그 아버지의 왕위 다툼의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는 ‘명실문란’

출공 아래서 벼슬하던 자로가 스승 공자에게 “선생님께서 정치를 하시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이름(명분)을 바로하겠다(必也 正名乎)”고 답했다. 이른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으로,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는 명실문란(名實紊亂)의 상태에서 나왔다고 주자(朱子)는 주석을 달았다.

‘정명(正名)’에서 명(名)은 그냥 이름일 수도 있고 명분(名分)일수도 있다. 공사(公私)의 조직에서 명분은 곧 직분(職分)이다.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은 궁극적으로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

이를 신분제 사회의 한계로 지적하여 반(反)민주적 발상으로 치부해버리면 더 논할 바가 없다. 그러나 이름만 가지고 장사해 보려는 사람들이 많고, 자기 직분을 소홀히 여기는 행태가 심한 지금 공자의 정명론은 여전히 유용한 정치론이다.

이름만 가지고 이익을 보려는 속임수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이름을 교묘하게 지어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용물은 소홀히 하면서 겉포장만 멋지게 꾸미려 한다. 심지어는 내용물과 상관없는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속임수에 불과한 명실문란의 현상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학교 이름도 학과명도 이런 식으로 짓는다. 

얼마 전 국회의원 몇 명이 직업훈련원인 ‘서울종합예술직업학교’의 이름에서 ‘직업’을 빼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이 학교가 뇌물까지 건네며 ‘직업’을 삭제한 것은 정규학교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학생 모집에 유리할 수 있겠지만 엄연한 속임수다.

대전간호전문대로 출발한 혜천대는 올봄 이름을 대전과학기술대로 바꿨다. 이름만 보면 한국과학기술대(카이스트)와 비슷하다. 대전에 있는 제2의 카이스트 대학쯤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과 내용이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여전히 간호학과 중심의 보통 전문대학이다.

과학기술대와 거리 먼 혜천대의 ‘낚시 교명’

일시적으로는 이름 덕을 볼 수도 있으나 성공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과학기술대란 이름에 걸맞게 교육 과정을 바꾸고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지 않는 한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교명이 실제와 너무 달라 오히려 대학의 신뢰도만 떨어뜨리고 이미지만 깎아 먹을 수 있다.

이런 식의 교명은 인터넷의 과장된 낚시제목과 다를 바 없다. 한때 인터넷 신문에서 그런 제목들이 유행했다. 일단 클릭을 유도하고 보자는 것이지만 기사의 내용과 제목이 너무 다른 뻥튀기 제목들이 잦으면 네티즌은 그 사이트를 찾지 않게 된다. ‘낚시 교명’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선택 시장 측근이 시장 노릇한다는 ‘명실문란’

그래도 교명은 수험생과 학부모가 조심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이 학교와 관련없는 제3자들에겐 별 상관없는 문제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공조직에서 발생하는 명실문란의 피해는 심각하다. 예를 들어 시장의 측근이 시장 노릇을 하고, 시장이 뒷짐을 지고 있다면 그 조직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대전시에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권선택 시장의 측근 김 모씨가 시장이나 부시장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고 의심한 만한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5급 별정직에 불과한 그를 만나기 위해 시청 안팎의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그는 권 시장이 취임하면서 경제협력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됐다. 보직의 ‘이름’대로라면 대전시 재정과 경제 분야에 대해 시장에게 자문해주는 정도의 자리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만나러 올 자리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순번대기표라도 만들어야 할 만큼 방문객이 많다는 비아냥이 나온다.

‘김 시장-권 특보’라는 말 나오는 이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청 공무원들 사이에만 도는 얘기도 있다. 시장 비서실장이나 총무과장 같은 실세 보직자와 첫 국장급 승진인사에서 덕을 본 사람도 김 씨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시청 안팎에 퍼져 있다.

방문자가 줄을 잇고 간부직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것으로 보이면서 김씨가 권 시장의 절대적 신임 속에 인사를 비롯한 시정 전반을 주무르고 있다는 말이 나돈다. 권 시장이 얼굴도 못 본 사람을 중책인 도시공사사장에 임명했다는 점은 김씨가 시장 노릇까지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반대로 권 시장은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김 시장-권 특보’라는 놀림까지 나오고 있다.

대전시 행정의 ‘명실문란’이다. 역대 어떤 시장 때도 측근 실세의 위세는 있었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하다. 부작용은 불보듯 뻔하다. 이명박 정부 때 실세 ‘왕차관’ 박 모씨의 말로가 어땠는가? 시장과 측근 모두 위험에 빠지게 돼 있다. 도장도 안 찍는 ‘무책임한 자리’에서 시정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위험한 일이다. 

권 시장, 김 특보 보호해주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권 시장은 김 씨를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측근이 시장 같다는 소리는 안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게 정말 어렵다면 그를 차라리 비서실로 불러들이는 게 낫다. 시장의 보좌관 사무실에 방문객이 줄을 잇는 장면은 대전시의 꼴불견 행정을 상징하지만 시장실 앞에 그런 모습이 연출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사 김 씨의 역할이 지금과 다른 점이 없다고 해도 명실문란의 문제는 좀 덜 수 있다.  5급인 그보다 벼슬이 높은 공무원들까지 명분도 없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불편함도 조금은 덜어줄 것이다. 명실문란의 방치는 시정을 위험에 빠뜨리고, 다른 공무원들까지 쓸데없이 불편하게 하는 일이다.

시청 공무원들이 권 시장에 대해 불만이 높아지는 데는 ‘정명’의 중요성을 간과한 점도 크다. 공자의 정명론을 2500년 전 정치론이라 하여 어찌 구닥다리  학문으로만 취급하겠는가? 대전시와 대전과학기술대는 참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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