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일보다 점수로 경쟁하는 사람들

김학용 주필
어떤 승진 탈락자 얘기를 하고 싶다. 주인공 B는 지금 대전시 소속 공무원이다. 15년차 6급(주사)이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시청 공무원들이 이 기사를 읽는다면 짐작할 수도 있다. 그가 기사로 써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으니 다루지는 말 것을 당부했다.

기사로 쓰면 안된다는 부탁.. 그러나

그의 부탁을 어기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유는 있다. B는 우리나라 공무원 조직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갉아먹는 커다란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다. 앞서 가게 만들어야 할 인재를 오히려 주저앉히는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한 단면이다. B 같은 공무원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인사 제도를 고민해보면서 그들의 억울함도 함께 생각해봤으면 한다.

B는 20년 전, 남경시에서 있었던 대전시와 남경시의 자매결연 행사 때 알게 된 ‘중국통’ 시공무원이다. 당시 그는 남경대에 막 입학한 국비유학생이자 시공무원으로, 대전시의 남경 방문단을 도와 통역도 해주었다. 이후 가끔 연락은 이뤄졌지만 가까이 지낼 기회는 없었다.

20명 동기중 혼자만 사무관을 못 단 ‘15년차 6급’

얼마 전 그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중국과 대전시의 변두리 부서를 오가면서 승진 경쟁에서 혼자만 낙오자가 돼 있었다. 그는 1978년 9급 공무원으로 시작했다. 동기 20여 명 가운데는 과장(4급)까지 오른 사람도 있으나 사무관(5급)조차 못 달고 6급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그뿐이라고 했다.

그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었는가 싶어 물어보니, “승진 점수 관리에 실패했다”고 했다. 해외에 나가 있으면서 근무평점을 최하위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 국내에 들어와 근무할 때도 해외 업무가 필요하면 시에서는 “다시 중국에 나갈 생각이 없느냐”며 중국 근무를 타진해왔고, 점수관리보다 현지 근무가 좋았던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중국으로 나갔다.

그가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이다. 총무처의 국비유학시험에 합격한 그는 애초엔 북경대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전시로부터 ‘남경시와 자매결연을 추진할 계획이니 남경대로 가면 좋겠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없이 바꿨다. 그는 남경대에서 피골이 상접하도록 공부하면서도 두 도시 간의 자매결연 업무 등을 열심히 도왔다.

“승진 실패는 점수 관리 못한 내 탓”

주로 중국 업무에 매달리다 보니 남들 다 올리는 승진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어느 때부터는 바닥권을 기기 시작했다. 이젠 사무관을 못 달고 퇴직할 처지까지 와 있다. 그는 “내가 선택한 셈이기 때문에 누굴 원망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밀려나고 있는 자신에 대해 회한이 적지 않아 보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승진이 전부인 게 공무원의 삶이다. 명예도 월급도 연금도 승진에 따라 달라진다. 그 점에서 그는 실패자다. 어느 조직이든 낙오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가 대전시에서 해온 역할과 공(功)을 생각하면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점수는 꼴찌지만 역할과 공은 톱클래스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중국 업무에 관한 한 그를 따라 올 사람이 없다. 권선택 시장은 작년 취임 후 얼만 안 돼 남경을 방문했다. 그 때 대전시장의 중국 출장을 수행할 ‘중국통’이 없어 현재 이 업무와 아무 상관없는 변두리 부서에 근무중인 그가 다시 나서야 했다. 

B가 없으면 중국 업무 쩔쩔매는 대전시

이른바 ‘지방외교 시대’다. 외국의 좋은 기업을 우리 지역에 끌어들이고,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을 돕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뛰는 시대다. 문화교류도 목적이다. B는 그 업무의 선발대였다.  지난 20년 동안 12년 정도를 중국에 가 있었고 본청에 들어와서도 관련 부서에서 많이 근무했다.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대전시장이 중국에 갈 때 제대로 안내하고 통역할 마땅한 사람이 없다. 중국 사람이 대전에 와도 마찬가지다. 중국어도 능통해야 하고 대전시 업무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은 B밖에 없다.

그래서 늘 대전시는 B에게 매달렸고, 그도 승진 점수를 포기하면서 중국 업무에 매진해왔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사람이 대신하기 어려울 만큼 자기 영역을 구축했다. 그러나 승진 낙오자가 되어 물러가야 할 형편이다.

조직의 장(長)이라면 종종 강조한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업무에 충실하게 일하는 게 자신과 사회를 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B를 보면,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 업무에 충실했고 조직에서도 필요한 인재가 되어 있다. 그런데도 승진에선 꼴찌가 됐다.

‘일’보다 ‘점수관리 경쟁’으로 승진하는 공무원들

만일 그가 기업에 들어가 일했다면 이런 결과를 빚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못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인재를 승진서열 맨 뒤로 갖다 놓는 바보 같은 회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공직사회에선 B 같은 사람이 탈락자가 되기 쉽다.

공무원들은 일보다 ‘점수 관리’를 통해 승진한다. 승진 점수는 대체로 일의 난이도나 결과보다는 점수를 매기는 사람과 누가 더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매겨진다. 공무원들이 적성이나 업무 능력과는 상관없이 주무국 주무과 주무계를 선호하는 이유다. B 같은 해외 근무자는 최하위 평점을 받게 돼 있고 열심히 해도 꼴찌를 면할 길이 없다.

B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공무원의 승진 시스템에 원인이 있다. 승진은 본래 업무에 공이 크거나 업무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 줘야 한다. 그러나 공과 능력을 따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근무평정 제도를 통해 점수를 내고 이를 기준으로 승진자를 가린다. 현실적으론 이를 대체할 만한 획기적인 방법은 없어 보이지만 B 같은 공무원들에겐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해외근무자가 아니어도 ‘점수 관리’에 소질이 부족한 공무원은 낙오자가 되기 쉬운 제도다. 일하는 솜씨는 시원찮아도 윗사람을 잘 모시는 사람이 ‘근무평정 경쟁’에선 앞서게 돼 있다. 이들이 높은 자리에 먼저 오르게 돼 있다.

근평제도의 이런 단점을 보완할 해줄 사람은 인사권자밖에 없다. 시도지사는 평소 누가 인재인지, 누가 열심히 일하는지, 또 억울하게 뒤처져 있는 사람은 없는지를 살펴 인사에 반영해야 한다. 본인이 직접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간부들에게 주지시켜 그런 인사가 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말로는 인재 발탁을 외치고 억울한 인사가 없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인사권자의 관심과 의지로 인사 시스템 보완 필요 

박근혜 대통령은 관피아 척결을 위해 ‘삼성의 인사통’ 이근면씨를 인사혁신처장으로 임명했다. 알고 보면 ‘점수 관리의 승자들’이 마지막까지 자기 몫을 챙기는 사람들이 관피아의 주역이다. 이제는 묵묵히 자기 일만 해도 인사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전시와 충남도 등 자치단체가 이런 인사혁신을 먼저 시도해보면 어떨까 한다. 인사는 무엇보다도 시도지사 자신의 의지에 달린 문제다.

B는 승진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이룬 건 있다. 중국의 명문 남경대에서 박사까지 땄다. 당장 공무원을 그만둔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주변에선 남들 못하는 중국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까지 땄다면 승진 못한 걸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황당한 논리다. 그렇다면 삼성전자가 전자공학에 취미가 있는 인재를 우대할 이유가 없다. 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회사에서까지 굳이 승진시키며 우대할 것인가?

몇 년 전 B의 미담 기사가 국내 언론에 났었다. 교민이 남경에 식당을 차렸다가 5000만원 사기를 당했는데 B가 억울한 사정을 전해듣고 백방으로 뛰어 4000만원을 돌려받게 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남경 유학생 아들이 갑자기 숨져 어쩔 줄 몰라하던 한 목사 부모를 돕기도 했다. B가 ‘조직과 사람’은 모르고 ‘일’만 아는 일벌레여서 낙오자가 된 것 아니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에 ‘B류’ 많으면 희망 없어

사람 사는 조직에선 '일' 말고 ‘점수 따는 능력’도 실력이라고 말한다. 그런 조직, 그런 사회에서는 성실하게 하면서도 점수관리에 소질이 부족한 ‘B류(類)’들은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이런 ‘B류’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들이 버림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큰 꿈을 꾸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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