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호 기고]

황인호 대전시의회 부의장

국토교통부가 지난 2월 5일 밤에 호남고속철 운행 노선을 기습발표하면서 대전지역은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양띠처럼 포근한 한해가 되길 기원하는 빛좋은 신년사들이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처럼 새해벽두부터 매몰되고 마는 참상을 맞았다. 10년간 잠재워둔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가 판도라의 생일을 축하해주며, 그녀에게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상자를 선물한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선물에는 후환이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호남고속철의 분기점이 오송으로 결정된 것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지만, 그 패배의식을 잠재울 6년간의 공사기간 동안 대전지역은 늘펀한 상태에서 구름사이에 낀 볕뉘만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설마하니 다 뺏기기야 하겠나, 우리 지역 정치력은 왜 이 모양이지, 적어도 콩고물은 떨어지지 않겠나, 자위반 자조반 하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금년 3월 개통을 앞두고, 코레일이 1월 7일 국토부에 호남고속철 운행계획 변경안을 낸 것이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지역 간 고속철 전쟁이 오송 분기전 이후 재점화 되었다. 코레일은 그나마 만성적자를 감안하여, 현재의 1일 62편에서 82편으로 20편이 늘어나는 계획 중에서, 18편만이라도 서대전역을 경유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물론 서대전역을 경유한다는 것은 계룡과 논산도 자동으로 경유됨을 의미한다. 이는 대전시에서 50%를 요구한 것에 비해, 수적으로 적지만 나름대로는 설득력이 있었다.

서대전역 현재 30여분에 한번 지나는 고속철 앞으로 2시간에 한번 지나

그러나 하루에 18편을 운행한다는 것은, 서대전역에 현재 30여분에 한번 지나가는 고속철이 앞으로는 2시간에 한번 지나간다는 얘기다. 디지털시대에 살다가 아날로그시대로 돌아간다는 얘기로 들리니 얼마나 황당할까? 그러나 대전권이 황당해할 여지도 없이, 이 마저도 호남지역은 양해는커녕 원천봉쇄하겠다며 떼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이미 10년 전에 호남권의 낙후상을 고려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호남고속철 신설계획의 취지로, 오송-공주-익산을 잇는 신설구간을 8조원이나 들여 만들 때부터, 45분이나 더 걸리는 서대전역 경유는 배제되었다면서, 그것이 원안이라며 정부와 대전권을 공격해왔다. 코레일 주장대로 18편이라도 운행할수 있게 해주면, 나중에는 점차 이용객이 많은 서대전역으로 열차 증편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아예 싹수부터 잘라내야겠다고 별렀다. 

대전권이 재차 황당해 한 것은, 같은 충청권이라 생각한 충북조차 호남권과 함께 서대전역을 고사시키려 나섰다는 점이다. 금년 초에 각 언론사가 주관한 신년교례회에 충북 쪽에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이와 관련 있을까 하는 의혹마저 떨굴 수 없을 지경이다. 사실이지, 삼남지방에서 영호남과 달리, 충청지역은 여러 정파가 어우러져 얼핏 민주적인양 보이면서도, 정파로 나뉘어져 구심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태에 도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 충북은 서대전역에 고속철이 경유하면 지근거리인 오송 역세권의 집중력이 떨어질 것이라 계산하면서, 형제간이라도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투로 싸움에 나섰다.

서대전역 배제하면 계룡역·논산역도 빠져 군사요충지로서의 기능 타격

실제 필자가 지난 1월 26일 대전시의회에서 이와 관련한 대정부 건의안과 성명문을 발의하면서, 여러 차례의 방송토론과 광주, 청주 쪽의 방송인터뷰를 한 바 있는데, 이때 특이하게도 공통된 질문이 ‘왜 서대전역을 경유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100년간이나 남북을 이어주느라 고생했다는 얘기는 않고, 그동안 중간에서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이제 그만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묻는 것이다. 

결국 대전권이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코레일의 제안처럼 경제적인 측면, 즉 호남선역 중에서 용산역 다음으로 많은 이용객을 지녔다는 점, 서대전역을 배제하면 계룡역과 논산역도 빠져 군사요충지(3군본부, 육군훈련소 국방대학)로서의 기능에 타격을 준다는 점, 대전에 거주하는 대략 45만 명의 호남 출향민을 포함하여 호남지역과의 이동을 차단한다는 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도 마침내 엄동설한에 핫바지 입은 채 당했다. 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하면, 1일 68편의 호남고속철은 호남과 충북의 주장대로 전적으로 오송-공주-익산을 경유하도록 하고, 호남고속철의 서대전역 미경유 대신에 1일 18편만 서대전-용산간 운행, 그리고 동대구-포항 간 경부고속철을 운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안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주장한 여러 명분 중에서 그저 군사요충지로서의 기능만을 고작 18편 운행으로 고려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대전-호남간 지역갈등을 야기시키는 북새통 중에서도 은근슬쩍 영남권을 포항간 경부고속철은 단단히 챙겼다. 한마디로, 이번에 일단락된 고속철 전쟁은 ‘영충호’시대는 얼어죽을(!), 철저한 영호남의 잇속 챙기기로 끝났다.

그러나 우리에게 불어닥친 후유증은 살어름으로 에어온다. 향후 대전과 호남권은 1000여년을 함께 해온 백제ㆍ기호문화권의 동질성에 타격을 입게 되고, 이것은 앞으로 정치ㆍ경제적 측면에서 또다른 파장을 예고한다. 그리고 당장 대전은 어떤가? 대전의 서부권 인구에게 철도교통에 대한 보편복지는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내년 개통될 급행버스(BRT)와 함께 대전역 주변 교통난 어찌 대처할지

서대전역에서 2시간을 기다려 용산에 가느니, 15분마다 오가는 경부고속철을 이용하여 서울에 가기 위해 저 멀리 대전역으로 몰릴 것이다. 이것은 서대전역 주변의 상권 쇠락과 대전역의 극심한 혼잡으로도 연결된다. 가뜩이나 대전역은 1일 4만7000명을 수송하면서도 5000석이 부족한 상태인데, 그 수요가 점차 폭증할 것이다. 이러한 이용객을 담을 주차장이 겨우 1000여대분 정도니, 주차난 또한 심히 걱정스럽다. 설상가상으로 내년에 개통될 급행버스(BRT)와 함께 대전역 주변의 교통난은 어찌 대처할 것인가?

정부는 호남권 민심을 담뿍 고려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전권을 위한답시고 서대전역에 반쪼가리 고속철 18편을 남겼다. 이는 나중에 민심이 잠잠해지면, 이용객의 편의를 위해서라며 슬그머니 호남권까지 연장 운행할 수도, 게다가 증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깔고 있는 것이다. 결국 코레일이 제안한대로 갈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상실감을 못내 떨칠 수 없을까?

불현듯 새로 나타난 임차인이 100년간을 지켜온 집주인에게 ‘방 빼’라고 해서 일까? 오송에 이어 두 번씩이나 수모를 당해서 일까? 대통령 하나 배출 못하고 마냥 지역갈등에서 패배해서 일까? 지도를 펼치니, 수도권과 영호남의 고속철망이 마치 문어발처럼 뻗어가고 있다. 그 한가운데 대전이 한껏 다이어트한 채 침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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