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전후임 갈등에 시민들만 피해

김학용 주필
대전 동구청이 운영하던 영어마을(동구국제화센터)이 결국 문을 닫았다. 영어마을로 큰 덕을 보던 서민 학부모들은 제발 문을 닫지 말라며 동구청에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국제화센터는 동구청이 운영하는 ‘공공 영어학원’이었다. 사설학원에선 월 23~25만원은 줘야 배울 수 있는 원어민 회화를 8만원만 내면 배울 수 있었다. 기초생활수급 가정의 자녀들은 100명 이내에서 무료로 들었다. 동구청은 대신 1년에 8억 원을 보조해주었다.

사설학원의 3분의 1 가격에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한때는 수강생이 1400명까지 늘었다. 자녀가 2~3명씩 되는 가정 중에는 영어마을에 보내기 위해 동구로 이사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현택 구청장 취임 2달만에 ‘영어마을 조사팀’ 만들어

하지만 2010년 한현택 구청장이 취임하면서 잘 운영되던 영어마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선 5기 구청장으로 취임한 지 두 달 만인 2010년 9월 구청 내에 ‘조사팀’이 꾸려졌다. 언론에는 국제화센터 공사비 등이 부풀려졌으며 10억 원 정도의 행방이 수상하다는 식의 기사가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영어마을 강사가 자신의 성행위 동영상을 유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구의회까지 나서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구의원 12명 가운데 의장만 빼놓고 11명이 참여하는 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구청 공무원과 영어마을 운영 위탁 업체인 웅진싱크빅 관계자를 불러다 추궁하고 따졌다.

웅진 측은 도의적 책임과 사과의 의미로 구청으로부터 받아야 할 국제화센터 사업비 잔금 35억 원을 구청에 환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구의회는 이를 받아들이고 집행부(구청)도 웅진의 제안을 수용할 것을 구청장에게 요청했다. 구의회는 이런 요구 사항을 담은 행정사무조사 결과보고서를 채택해서 구청장에 보냈다.

구청장 웅진의 35억 제안 걷어차고 소송했으나 패소

그러나 구청장은 웅진의 35억 제안을 거부하고 영어마을 문제를 감사원으로 끌고 갔다. 감사원은 구의회의 조사가 이뤄진 만큼 감사 대상이 아니라며 기각했다. 그러자 한 청장은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갔다. 웅진이 ‘부당이득금’을 챙기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 2, 3심 모두 완패였다.

웅진이 기부채납을 약속하고도 건축비를 받아간다는 게 구청의 주장이었으나 협약서에는 동구청이 웅진에 건네야 하는 금액의 명세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어, 소송을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구청이 무리한 소송을 강행한 결과였다.

최종심의 패소로 다급해진 구청은 30억 원의 빚을 내고 예비비 10억 등을 더해 웅진에게 43억 원을 갖다 바쳤다. 구청장이 구의회의 요청을 따랐다면 35억 원을 벌었을 문제를, 오히려 30억 원이나 되는 빚까지 내서 갚아야 했다. 전적으로 구청장의 책임이다.

한현택 구청장은 취임 두 달 만인 2010년 9월 전임 구청장의 작품인 영어마을 ‘손보기’에 들어갔다. 임기 내내 조사와 소송에 매달렸으나 완패였다. 35억 원만 날리면서 끝내 영어마을도 문을 닫았다.

동구청의 황당한 소송 강행 이유

구청장은 웅진의 35억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구청 측의 해명은 황당하다. 당시 동구의장이 개인적으로 낸 성명서를 핑계대고 있다. 동구의회가 웅진 측의 35억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사무조사 결과보고서를 구청장에게 보낸 다음날, 당시 구의회 의장은 ‘웅진은 동구에서 떠나라’는 성명서를 냈다. 의장 자신이 전날 방망이를 두드린 공식 안건을 뒤집는 행동이었다.

구의회의 ‘공식 의견’은 35억 원을 받으라는 것이었고, 구의장의 ‘개인 의견’은 35억원을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구의장의 성명서는 구의회의 절차를 거친 게 아니어서 개인의 의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구청장은 사실상 구의장의 말을 따르면서 35억을 받으라는 구의회의 요구를 묵살했다.

구의장의 개인 성명서는 웅진 측에도 전달됐다. 그럼에도 웅진 측은 “35억 반납은 동구청과 우호적 관계와 교육서비스(영어마을 운영)가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놨다. 동구와 우호관계를 계속한다면 35억을 반납(환원)하겠다는 의미였다.

웅진은 35억 반납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구의회 조사특위 현장에 변호사까지 대동하여 구의원들 앞에서 약속을 했었다. 조사특위에는 구청 공무원들이 배석해서 웅진의 35억 기부 의사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구청장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웅진이 35억을 내놓겠다고 제안한 내용.. 동구청은 이를 35억 원을 내놓을 뜻이 없다는 뜻이라며 억지를 부리고 소송으로 끌고 갔다. 결국 35억원만 날아갔다. 전적으로 한현택 구청장 책임이다.

전임 청장 작품 없애거나 전임 타격이 목적

그런데도 동구청은 지금도 “웅진이 환원 의사를 철회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동구청의 속뜻은 웅진과의 계약을 깨는 데 있었다. 나아가 이 사건을 더 깊이 파헤쳐 ‘10억원 미스터리’의 진상을 캐보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애초 한 청장이 취임 후 바로 ‘영어마을 조사팀’을 꾸린 목적도 바로 10억 원의 주인공을 밝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이 확대되면 영어마을 사업을 추진한 이장우 전임 구청장이 의심받고 타격을 입게 돼 있다. 10억 원의 행방이 정말 의심된다면 감사를 벌여야 하고, 감사가 어렵다면 검찰에 수사의뢰를 해야 한다. 동구청은 의혹만 제기해놓고 진상은 밝히지를 못한 셈이다. 의혹이 명백하다면 지금이라도 검찰에 수사를 의뢰해야 마땅하다. 동구청은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10억원 증발 미스테리와 영어마을 운영은 별개의 문제다. 구청이 스스로 공돈 35억 원을 걷어찰 이유가 없다. 구청 관계자는 웅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송으로 웅진을 이겨도 손해는 아니라는 계산이 있었다고 했다. 참으로 황당한 구청이다. 기업 스스로 수십억 원을 내놓겠다는데 그걸 거부하고 소송으로 돌려받으려는 구청이 제정신인가? 

“전임 청장의 신청사 신축 때문에” 핑계만 대는 '중단 포기 행정'

‘전임자의 흔적 지우기’가 목적이었다면 한 청장은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이제 전임 구청장이 세운 영어마을은 잡초로 우거질 것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구민들은 전임 구청장이 억지를 부려 국제화센터를 세우더니 결국 저 꼴이 되고 말았구나 하고 전임 구청장을 욕할 것이다.

물론 전임 구청장이 영어마을 추진할 때 재정문제를 걱정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구의 경우 다른 지역과는 달리 통학형 영어마을이어서 예산이 비교적 적게 들고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효과를 봤다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동서교육 격차 해소에도 도움이 됐다.

대전 동구청은 언제부턴가 재정난의 대표기관처럼 되어 있다. 호화청사를 짓는 바람에 심한 재정난을 겪는 자치단체로 자주 소개되고 있다. 전임 청장이 빚을 많이 져서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는 식의 얘기가 동구 내에 많이 퍼져 있다. 

그러나 한 구의원은 “구청 스스로 재정난을 일부러 과장하는 측면이 크다”며 “신청사 때문에 빚이 많아 공무원 월급도 못줄 것처럼 엄살을 부리지만 언제 공무원 월급 밀린 적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구청이 재정난을 핑계로 서민들 피해만 강요하고 있다며 영어마을 폐쇄도 그 중 하나라고 했다.

잘 운영되던 동구 영어마을이 결국 문을 닫았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현직 구청장의 ‘전임자 흔적 지우기’로 보인다.

재정난을 핑계로 사업 중단을 능사로 한다면 구청장이 왜 필요한가? 구청장은 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살릴 것은 살리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동구청은 재정난을 이유로 전임 청장이 시작한 0시축제와 국화축제를 없앴다. 대청호 주변에서 열리는 국화축제는 수익성도 좋은 축제였다. 이곳의 한 주민은 “현 구청장은 전임 청장이 했던 것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 주민의 말이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 동구청장은 전임자의 흔적 지우기에만 힘쓰고 있다. 동구청의 변명처럼 재정이 문제라면 ‘공돈 35억 원’을 걷어차고 소송을 끌고 가지 않는다. 그 돈을 받았다면 1000명 이상이 배우는 영어마을을 4~5년은 수강료 예산 걱정 없이 운영할 수 있고 국화축제도 10년 이상은 거저 할 수 있다. 동구청의 걱정은 재정문제보다 너무 심한 전후임 갈등에 있다.

현 구청장과 전임 구청장은 지난 민선5기 지방선거에서 맞붙어 생존 게임을 벌였다. 4년 뒤인 지난해 선거 때는 공천과정에서 국회의원과 현직 청장으로 대결하다 결국 현직 구청장이 당을 옮겨 재출마했고 재선 구청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정적 관계다.

그러나 한현택 청장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현직 구청장’이라는 점이다. 행정에 사감이 끼어들면 구민들이 피해를 보게 돼 있고, 결국은 자신에게도 손해가 될 수밖에 없다. 신청사 때문에 가중된 재정난은 분명 전임 구청장의 책임이다. 하지만 현직이 그것을 핑계로 아무 일도 안하면서 전임자의 흔적 지우기에만 힘쓴다면 전임 구청장보다 더 욕을 먹게 돼 있다.

전임과 후임의 갈등 문제는 다산이 목민심서에도 경계한 바다. 전후임 갈등이 자주 있다는 뜻이다. 다산은 “전처가 후처를 미워하고 구장(舊將)이 신장(新將)을 미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친구끼리도 자리를 교대하다 원수가 되는 사례가 허다하지만 양쪽 모두 화(禍)를 취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현 청장이나 전임 청장이나 정말 구민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그게 진정으로, 최종적으로 이기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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