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 눈] 의료·경제팀장 최태영

오수정 대청병원 원장을 만나던 지난 24일 오후 3시. 그의 집무실은 어둠과 함께 적막감마저 흘렀다. 훤한 낮임에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 실내는 꽤 어두웠다.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오 원장은 실내 조명을 켜지 않고 어둠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왜 그랬을까.

대청병원은 지난 3월 9일 대전 서구 정림동에서 일부 과목의 진료를 시작으로 병원을 개원했다. 이후 5월 21일 정식 그랜드 오픈식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22일 뽀빠이 이상용을 초대, 병원 앞마당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정식 개원 기념 큰잔치를 벌였다.

결과적으로는 잔치를 벌이던 이날이 대청병원에게는 초상집이 됐다. 대전 첫 메르스 감염자였던 16번 환자가 이날 밤 늦게 대청병원에 들어와 약 일주일간 입원해 있다가 건양대병원으로 옮겼다. 그 뒤 대청병원에서 추가 확진자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총 14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대전에서 발생한 확진자(27명)의 절반이다.

사실 메르스 발생 이후 오 원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수주일 전부터 인터뷰 요청을 했었다. 그런데 담당자는 전화조차 받질 않았다. 아니, 통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만큼 병원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사실조차 인터뷰를 하면서 뒤늦게 알았다.

병원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6번 환자가 입원해 있던 51병동의 간호사와 의사 등 수십 여명의 의료진은 자택격리조치 됐다. 원내 다른 의료진이 이 병동에 투입돼야 할 상황임에도, 의료진조차 꺼렸다. 상황은 악화돼 갔다. 메르스 의심자 뿐 아니라 기저질환으로 앓고 있는 고령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30대 중후반 40대 이상 수간호사와 책임간호사들이 나섰다. 집에선 어여쁜 아이들의 엄마이자 한 남편의 사랑스런 아내들일 주부 간호사들이 앞장서 51병동 근무를 자청했다.

오 원장에겐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의사들조차 꺼리는 상황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의사 3명도 “젊으니까, (메르스에 감염되더라도) 죽기야 하겠냐”며 51병동 근무를 자원했다.

기자가 오 원장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고려했던 원칙 중 하나는 ‘(대청병원을)동정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겠다’였다. 메르스에 직격탄을 맞은 병원의 안타까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대처 등에 대해 소홀했던 건 아닌지를 냉철하게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건조한 얼굴로 문답(問答)을 메모하다가 나도 모르게 목이 메곤 했다. 중년의 나이든 엄마 간호사들이 남편과 자식을 충분히 고려했을 법 했을 텐데도, 사지로 뛰어들겠다고 나선 부분이 그랬다. 이들이 직접 식사부터 소독, 청소, 간병과 간호 등 1인 4역을 했다는 부분에서도 그랬다. 방호복을 입고 그렇게 열흘간 속옷까지 땀에 흠뻑 젖어 가며 메르스와 사투를 벌였을 간호사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부분에서도 그랬다.

콧등이 시큰한 순간도 많았다. 남편과 자녀들이 엄마로 인해 직장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야 했다. 엄마의 직장이 단순히 이 병원에 근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병원에 지원 나온 자원봉사자들 역시 이 병원을 다녀간 뒤부터 동네에서 왕따를 당해야 했다.

오 원장은 인터뷰 중간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방을 어둡게 했을 것이다.

몇몇 간호사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솔선수범했고 신의와 사명감으로 앞장섰다. 때론 따뜻하게 서로를 격려하며 동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인간미도 느껴졌다. 강인한 영웅만이 아닌, 그 어느 누구보다 고독과 아픔을 삼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오 원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속으로 참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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