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추진 행정’ 대신 ‘관리 행정’ 펴야

김학용 주필
누구든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여 대우해야 한다. ‘무죄 추정 원칙’은 특히 인권 분야에 대해 철저하게 적용돼야 한다. 죄 지은 게 분명해보여도 가급적 구속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은 무죄 추정 원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정치 행정 분야에선 ‘유죄 추정 원칙’ 따르는 이유

그러나 ‘유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돼야 하는 분야도 있다. 정치와 행정은 여기에 해당된다. 이완구 전 총리는 사건이 터지자 결국 총리 옷을 벗고 개인 이완구로서 무죄를 다투고 있다. 그가 물러난 것은 죄가 확인돼서가 아니라 정치에서 적용되는 유죄추정의 원칙 때문이다. 이 전 총리는 물러남으로써 정치적 책임을 졌다.

지방자치단체장도 마찬가지다. 시도지사가 중대한 재판을 받고 있다면 무조건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행정을 수행할 수는 없다. 임기가 한참 남은 자치단체장이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인정받았다면 대법원 판단이 남아있다고 해도 행정은 유죄 추정 원칙에서 이뤄지는 게 맞다.

지금 권선택 시장에게 해당되는 경우다. 권 시장은 1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고 2심에서도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다.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인정받은 선거 사건을 대법에서 뒤집는 건 쉽지 않다. 권 시장이 시장직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게 정상이다.

법적으론 시장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날까지는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행정만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행정이란 한번 결정을 해놓으면 다시 뒤집기 어렵고, 가능하다고 해도 인력과 비용에서 막대한 낭비가 불가피하다. 유죄 추정 원칙을 따라야 하는 이유다.

권 시장, 당분간 ‘추진행정’ 말고 ‘관리행정’으로

권 시장은 도시의 미래 문제를 결정하는 일 같은 중대 현안에는 당분간 손을 떼야 한다. 호수공원이나 트램사업도 일단 중지해야 한다. 트램 사업은 시작도 못한 마당에 용역까지 고가방식을 지지했던 사람이 트램용역을 수행하고 있으니 성사는 어차피 불투명해졌다.

호수공원 사업도 아직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고, 지금 권 시장이 어떤 결정을 해도 다시 뒤집힐 수 있다. 권 시장이 이런 사업에 끝까지 집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 권 시장은 당분간 사업을 밀어붙이는 ‘추진 행정’ 대신 조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관리 행정’에 힘을 쏟아야 한다.

대법 판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권 시장이 논란이 큰 사업에 대해 “대법원 판결까지 잠정 보류하겠다”고 선언하면 그거야말로 권 시장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포기 선언도 아니고, 재판이 마무리 되는 시점까지 당분간 보류하는 조치인 만큼 자신의 공약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논란이 큰 사업의 일시적 중단 조치는 권 시장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행동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조치가 재판에서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지 않다. 행정에 대한 태도와 자세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다면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 밀어붙이는 태도보다는 ‘유죄 추정 행정’으로 수위를 조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재판할 때 자신감은 갖되 마치 자신이 반드시 이길 것처럼 하는 태도는 오히려 불리하다.

막연한 낙관론자들 권 시장의 진정한 우군일까?

트램이나 호수공원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권 시장의 편이 아니다. 권 시장이 어떻게 되건 말건 하루속히 자신들 이익만 관철시키려는 부류들일 수도 있다. “대법에서는 꼭 살아날 겁니다!”라며 막연한 낙관론만 펴는 사람도 권 시장의 진정한 우군은 아니다. ‘나쁜 결과’까지 가정하고 거기에 대비해서 조언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찾아내서라도 대화하고 상의해야 한다. 

권선택 시장이 최근 산하 기관장 회의를 주재하고, 기관장 임기 보장 문제까지 언급하며 조직을 다잡고 있다.

1, 2심에서 잇따라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은 시장이 정상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라도 이런 상황에선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선, 권 시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내부 조직원인 공무원과 시민들한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말과 행동뿐이다.

지금 권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대전시와 권 시장에 대해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보통 시민들’과 ‘정직한 공무원들’로부터 “맞아! 권 시장의 생각이 옳아! 그렇게 해야 돼!”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취하면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하면 된다.

권 시장은 2심재판 뒤 선거구 증설 대전범시민협의회 출범식에 참석해서 환하게 웃는 낯으로 각계 시민대표들과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심에서조차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도 표정은 밝았다. 심적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텐데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평소 살펴보지 못한 불우한 이웃을 찾아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주는 일도 시장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다. 시장은 큰 일보다는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더 챙겨야 한다.

기강 흩트리는 직원들 일벌백계 필요

권 시장이 위기에 몰리면서 공무원과 산하공기업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제 권 시장은 산하기관단체장회의에서 “기관장은 임기가 보장된 게 아니다”며 조직을 다잡았다. 필요한 조치다. 조직은 한 순간도 방치할 수 없다. 조직 혼란을 틈타 잇속을 챙기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상응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기강 확립을 위해선 감사권과 인사권도 과감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호수공원 사업을 맡고 있는 도시공사는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속도를 내고 있다. 국토부의 실시계획 승인을 거쳐 지방재정투자심사를 받은 뒤에 보상절차가 진행돼야 하는데 이런 절차가 무시되고 있다. 도시공사는 성북동 골프장 사업도 추진한다고 한다.

호수공원이든 골프장이든 대전시가 책임져야 하는 사업이다. 도시공사는 이런 일을 책임질 만한 기관이 못 된다. 그런데도 대전시 뜻과는 상관없이 추진하는 듯한 모습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추진 상황을 파악하고 감사를 벌여 책임자를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이럴 땐 경고에 그쳐선 안 된다.

대법 판결로 모든 게 끝나지 않도록 대비해야

대법 판결로 모든 게 끝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권 시장의 ‘앞날’은 아직도 권 시장 자신한테 상당 부분 달려 있다. 우선은 법정에선 ‘무죄 추정 원칙’으로 끝까지 다투되 시장으로선 ‘유죄 추정 행정’으로 수위 조절을 해야 한다. 대신 조직 관리는 시장의 인사권과 감사권을 동원해서라도 보다 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유죄 추정 행정’은 나쁜 재판 결과를 가정한 것이지만 오히려 권 시장의 자신감과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이 권 시장 자신의 앞날을 전부 결정하지는 않도록 대비했으면 한다. 그러면 위기 속에서도 좀 더 여유있게 시정을 이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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