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 눈] 안희정 '불펜투수론'이 한가하게 들리는 이유

8월 1일 한화이글스와 기아타이거즈의 경기에서 시구를 한 뒤 심판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 (사진: 충남도 제공)
어린 시절, 기자에게도 야구는 참 재미있는 놀이였다. ‘보릿고개’란 말이 많이 사라졌을 때인데도 왜 그리 물자가 귀했던지, 글로브나 배트는커녕 공 하나도 드물어 상대 편 타자가 친 공을 찾느라 연신 경기가 중단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경기 인원도 충분치 않다보니 한 사람이 투수도, 타자도, 심지어는 심판과 감독, 물 당번도 해야 했다. 그 중 골목대장급이라면 ‘세이프이냐, 아웃이냐’를 놓고 상대 편 감독과 드잡이를 하기 일쑤였다. 그 경기가 마을 대항이었다면 다툼의 강도는 훨씬 세졌었다.

안희정 충남지사의 ‘불펜투수론’이 한가하게 들리는 이유

안희정 지사도 초등학교 때까지 선수가 꿈이었을 정도로 야구를 좋아한다고 한다. 안 지사가 2017년 대선 출마에 대한 질문에 ‘불펜투수론’을 꺼낸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안 지사는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하다면서도 감독(국민)의 등판(출마) 명령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1이닝이라도 정확히 던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야권의 차기 유력 대선주자로서 탁월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참 한가한 소리로 들리는 건 왜일까?

지난달 30일 진행된 안 지사의 ‘7개월만의 기자회견’은 실망스러움의 극치였다. 약 30분 간 진행된 모두발언의 내용은 그동안 외부 강연이나 바로 전날 예산혁신 대토론회에서 한 것과 대부분 일치했다. 기자들 사이에서 “또 그 얘기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행정혁신에 대한 의지, 정치 불신의 원인에 대한 진단 및 처방, 지방자치제도의 문제점 지적 등 거대담론에 집중됐는데, 기자회견 장소가 행정자치부나 지방자치발전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 또는 청와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뜬구름 잡기 식 철학 강의’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철학 강의로 끝난 7개월만의 기자회견…소통은 실·국장과 하라고?

안 지사는 “거대담론에 집중할 경우 정작 도정이 소홀하게 다뤄질 수 있다”는 지적에 “(도의) 직무편람이 4500개나 된다. 이것을 다 어떻게 이야기 하나?”라며 자신을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했다. 4500개를 다 묻겠다는 것이 아니었는데 돌아온 답변이었다.

안 지사는 도정의 개별 현안에 대해 물을 경우 충실히 답변하겠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 거대담론을 이야기 하는데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한 상황이라, 그런 질문을 하는 기자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는 특히 언론과의 소통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실·국장들을 장관처럼 대해 달라(소통은 실·국장과 하라)”며 사실상 거절했다. 대통령으로 치면 “수 만개에 달하는 업무를 다 어떻게 말하나? 나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바꾸고, 인류애의 증진을 위해 노력할 테니 국내 현안은 각 부처 장관과 상의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안 지사는 기자회견문에 담긴 ▲안면도 국제 관광지 개발 좌초 ▲ 황해경제자유구역 지정 취소 ▲ 당진·평택항 매립지 도계분쟁 등 도정의 굵직굵직한 현안에 대해서는 “다 아시는 내용”이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안 지사로부터 “당진시민 여러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긴 당진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태안군민 여러분, 안면도 관광지 개발 사업에 대한 대안을 하루 빨리 마련해 추진하겠습니다”라는 등의 말을 들을 수 있길 바랐던 기자의 입장에서는 충남도정의 선발투수이자 4번타자가 커튼 뒤로 숨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충남도정의 선발투수·4번타자 실종사태… 이재명 성남시장과 비교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유일하게 얻은 것은 안 지사가 지금 어느 무대에 서고자 하는지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야구선수로 치면 몸은 봉황기배 고교야구에 있는데, 마음은 이미 한국시리즈에 가 있는 모양새다.

그런 안 지사에게 “제발 도정에 집중해 달라”는 주문을 일관되게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기도 하다. 안 지사는 “거대담론이 다 도정과 연관돼 있다”고 반박했지만, 기자에게는 “도정에 신경 쓸 이유도, 겨를도 없다”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일면식도 없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언행이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 역시 야권의 차기 대선 주자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성남시민만 챙겨서 죄송합니다”란 글에서 “지금은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일을 잘 해내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안 지사에게 이런 자세를 바라는 것이 더 이상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앞으로의 도정이 걱정돼 사족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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