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도청 실국장 장관론은 도지사의 오만

김학용 주필
안희정 지사는 “(도청) 실국장을 장관처럼 대해 달라”며 “실국장들이 어떤 결정을 할지라도 그건 제 결정”이라고 했다. 얼마 전 안 지사가 7개월 만에 도정 기자브리핑 자리에서, 도지사는 왜 브리핑을 자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나온 답변이다.

안 지사 “도청 실국장을 장관으로 대해달라”

안 지사 자신은 도정브리핑을 가급적 하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해졌다. 도청 문제는 지사 대신 실국장들이 설명해줄 테니 그것으로 갈음해 달라는 말이다. 소통과 대화를 외치던 도지사의 입에서 왜 이런 대답이 나오는가?

‘실국장 장관론’의 명분을 찾자면 안 지사가 추구해온 ‘행정혁신’과 관련이 있다. 그는 공무원이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면 행정조직이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도지사는 이런 시스템이 잘 운영되도록 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믿는 것 같다. ‘시스템 행정’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운영된 적이 없지만 행정혁신을 통해 그런 시스템을 만들면 ‘일 잘하는 공무원’으로 바뀔 것이라고 안 지사는 믿는다. 정직하고 유능한 관리자(도지사)가 조직의 지휘자가 되어 공정하게 관리한다면 공무원들마다 업무 성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다.

행정혁신 통해 ‘시스템 행정’ 되면 ‘실국장 장관’ 가능

이런 방식으로 ‘일 잘하는 충남도’를 만들어 도민들, 나아가 전국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게 아마 안 지사가 바라는 행정혁신일 것이다. 그는 그날 기자회견에서 “종전의 정치와 행정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정치와 행정을 도정을 통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행정혁신 곧 시스템 행정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시스템 행정이 실현된다면 꼭 도지사가 기자브리핑을 할 필요는 없다. 도지사는 특별한 경우에만 기자회견을 열고, 웬만한 사안은 실국장이 자기 책임 하에 기자회견을 열어 도정을 설명하면 된다. 그게 안 지사가 답한 ‘실국장 장관론’일 것이다.

하지만 실국장 장관론은 현실성이 없을 뿐더러 안 지사 자신이 비판한 ‘중앙정부 하청업체론’과도 모순이다. 안 지사는 회견에서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있어서 지방정부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지방자치단체를 하청업체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도지사 권한도 없다는 말인데 실국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책임질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실국장의 기자회견은 그저 업무 담당자가 민원인을 응대하는 자리일 뿐이다.

행정혁신 명분 내세워 현실 도정에 소홀한 도지사

안 지사가 추구하는 ‘시스템 행정’은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런데도 안 지사는 이를 명분으로 내세워 도정을 소홀히 하고 있다. ‘행정혁신’ 실험에는 노력하고 있는지 몰라도 ‘현실의 도정’에는 소홀하다는 증거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황해경제자유구역 지정 실패와 당진-평택 경계선 분쟁 등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경제자유구역 지정은 충남도와 이웃한 경기도는 성공했다. 심지어 바다가 없는 충북마저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받았는데 충남도는 실패했다. 당진 땅을 경기도 평택에 빼앗기게 생긴 경계선 분쟁도 도민에게 실망을 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충남도가 왜 실패를 하고 있는지조차 도민들은 잘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도지사 입을 통해 명확하게 해명된 적이 없다. 도지사조차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일을 실국장이 나서서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나? 어림없는 일이다.

안 지사는 행정혁신을 통해 지방재정상태까지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있다. 다른 타 시도에서도 배워간다는 혁신의 모범 사례다. 그러나 중요한 지역 현안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도민들은 제대로 알 수 없다. 사고가 터진 후에야 알려지곤 하지만 타이밍이 늦으면 일은 더욱 꼬이기 마련이다.

7월30일, 7개월만에 열린 안 지사의 도정브리핑. 도지사는 왜 브리핑을 자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안 지사는 실국장을 장관으로 대해달라고 했다.

대권후보 안희정 말고, 충남 지사 안희정에게 갑(甲)은 누구인가?

잇따른 도정 실패의 큰 원인은 도지사가 몸소 해야될 일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임 심대평 지사 때는 도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도지사와 담당자들이 밤을 새워 협의하고 대안을 찾았다고 한다. 결과가 나오면 도지사도 현장으로 뛰었다. 필요하면 도지사가 직접 중앙 부처의 국장은 물론 과장까지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고 전직 도청 공무원은 말한다.

도지사는 지역에선 ‘갑(甲)중의 갑’이지만 지역을 위해선 도지사 자신이 을이 되어 하는 때가 있다. 도지사도 혀짧은 소리를 해야 하는 곳들이 적지 않다. 그곳이 중앙부처 실무자든, 국회의원이든 기업대표든 도지사가 먼저 을로써 찾아가야 한다. 국비확보 위해서 국회를 방문하지만 사진 찍고 동정기사로 나오는 행사는 도지사 자신의 홍보일 뿐이다. 형식적인 방문은 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시스템 행정’에선 갑과 을이 있을 수 없다. 공정한 시스템 행정이라면 중앙정부는 도지사 부탁이건, 실국장 부탁이건 합당하면 들어줘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갑과 을이 있고 ‘인맥’도 동원돼야 한다. 도청 국장이 하면 안 되고 도지사가 나서야 되는 일도 많다. 도지사가 직접 을로써 찾아가야 하는 곳들이 많다.

대권 예비후보 안희정 말고, 충남지사 안희정에겐 과연 갑이 있는가? 안 지사가 도정 현안 때문에 절실하게 찾아가 사정하고 매달린 갑들은 누구인가? 안 지사가 도청 행사에 대통령 방문을 요청하는 청와대 빼놓고 또 다른 갑이 있는가? 실국장을 장관으로 대해달라는 태도라면 안 지사에겐 을을 자처하는 갑이 거의 없을 것 같다. 당진-평택 경제선 문제도 이런 점에서 충남도는 처음부터 지는 게임이었다. 평택시장은 경계선 분쟁에서 1차적으로 키를 쥔 안행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실국장 장관’은 을(乙)의 역할 거부하는 ‘충남 대통령’의 오만

안 지사는 처음 도지사가 되어 충남도 직제표에서 도민을 맨 위에 두었다. 도민을 갑으로 섬기겠다는 뜻이었다. 도정 브리핑조차 대통령이 담화하듯 본인이 필요한 때만 하겠다는 것은 도민조차 을(乙)로 여기는 것 아닌가? ‘실국장을 장관으로 대해달라’는 말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안 지사 자신을 ‘충남 대통령’으로 여기는 평소 인식에서 나온 잘못된, 오만한 당부다.

안희정 지사가 처음 도지사가 되어 도민을 받들겠다는 뜻으로 만든 직제표

안 지사는 ‘행정혁신’(시스템 행정)을 명분으로 도정 책임만 회피하고 있다. 당진-평택 경계선 분쟁은 당진시민과 충남도민 전체에 큰 상처를 주고 있는 데도 관련 공무원들을 승진시켰다. 도지사가 말로만 내 책임이라고 했을 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행정혁신은 도지사도 공무원도 책임조차 지지 않는 무책임 행정으로 전락하고 있다.

안 지사는 도지사의 역할을 지휘자에 비유하고 있다. 맞다. 지휘자의 역할은 도지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그러나 도지사도 자신이 직접 다뤄야 하는 악기가 있다. 4500개의 악기(안지사가 언급한 도 업무 가지수)를 모두 다룰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황해경제자유구역, 당진-평택 경계선 분쟁, 안면도 개발 건 등은 도지사 직접 다뤄야 하는 악기다.

이런 일은 도지사가 ‘대표 공무원’이 돼서 직접 일을 챙기고 도민들에게 직접 보고도 해야 한다. 도지사는 단순한 지휘가 아니라 본인이 앞장서서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 ‘실국장 장관론’은 도지사 자신은 뒤로 빠져 지휘만 하고 앞장서지는 않겠다는 것이며 을의 역할은 거부하는 태도다.

도의회와 갈등도 안지사의 ‘충남 대통령’ 인식에서 출발

안 지사는 도의회와 극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도의회가 안 지사의 실정(失政) 책임을 묻는다며 ‘안희정 특위’를 만드니까 안 지사 편에선 도의장 불신임안을 들고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론 안 지사가 도지사로서 갖는 ‘갑의 권위’을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갈등이라고 본다.

도의회는 충남의 ‘최고 갑’인 도지사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도지사가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갈등이 커지게 돼 있다. 안 지사가 스스로를 ‘충남 대통령’으로 여기고 있다면 도의회의 시비에 유연하게 대하기 어렵다. 도지사-도의회 갈등의 본질이다. 잇단 도정 실패의 원인과 다르지 않다.

안 지사가 추구하는 행정혁신 곧 ‘시스템 행정’은 옛 성현들이 실천했다는 ‘위임형 정사’ 유형에 속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위임형 행정의 성공모델로 한나라 때 동해 태수를 지낸 급암(汲黯)을 소개하고 있다.

“급암이 동해 태수가 되었을 때 백성을 다스리되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자기의 속관을 골라서 일을 맡기고 다스림에는 대체(大體 대강`)만을 살필 뿐 조금도 가혹하지 않았다. 급암이 병이 많아서 안방에 누워 한해가 넘도록 밖에 나가보지 않았으나 동해 지방이 잘 다스려졌다.”

안 지사가 추구하는 도백 모델일지 모른다. 하지만 안 지사는 다산의 충고도 새겨들어야 한다. “급암은 평소 위엄과 명망이 두터웠으며 능히 사람을 알아보아서 맡겼으므로 이와 같을 수가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를 본뜨다가는 집집마다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섣부른 ‘위임형 행정’에 도청 공무원들은 한숨소리

지금 충남도는 어떤가? 충남도 공무원노조는 5일 “도지사는 자식들(도청 직원)이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하다”며 도청 공무원들의 한숨소리를 전했다. 바른 말을 하는 간부를 찾아볼 수 없다는 불평까지 나오는 걸 보면 도지사가 일을 맡길 만할 인재도 없다는 뜻이다. 도민과 공무원들의 한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실국장 장관론’은 취소돼야 된다. 안 지사는 ‘충남 대통령’이란 자부심은 갖되 도민과 공무원들에게 ‘대표 공무원’이란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도정 현안을 해결하고 도의회와의 갈등을 푸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야 대한민국 대통령에 도전할 기회도 온다. 공무원노조의 말처럼 아직 안 지사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다.

충남도 공무원노조가 5일 발표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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