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 칼럼] 충청유교문화원 입지 선정 갈등, 논산시장 사퇴해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충청유교문화원 건립 부지가 약속된 각본(?)에 따라 노성면 병사리(宗學堂) 일원으로 최종 결정됐다는 소식이다.

필자는 논산시 연산면 출신으로 현재도 이곳에 살고 있는데 이번에 문제화 된 충청유교문화원(忠淸儒敎文化院)과는 인연이 깊다. 필자는 지난 시절 충남발전연구원과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근무 한 바 있다. 특히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퇴직 시에는 경영기획실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고향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기호유교문화권사업’이다. 당시 논산시장이었던 임성규 시장도 3억원이라는 많은 예산을 용역비로 세워 우리 연구원에 주었다. 임 시장은 나에게 “용역으로 끝나지 말고 꼭 문화관광부와 협의해 예산을 많이 따오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필자는 이 사업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運命)이라 생각하고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정부부처는 물론 충남도를 찾아다니며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시 도지사였던 이완구(국회의원), 기획실장였던 정재근(행정안전부차관), 문화관광국장였던 서철모(천안부시장)는 항상 든든한 후원자였다.

핵심은 영남유교문화권과 기호유교문화권사업과 차별성이었다. 문화관광부에서도 영남유교에 많은 예산이 지원됐으니 기호유교문화권도 그 이상 지원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지원된 영남권유교예산액은 5-6조원에 달한다.)

연구원들과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과연 무엇으로 영남권과 차별화 할 수 있는가 하는 난제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논산기호유학의 큰 테마는 다름 아닌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한 예학(禮學), 종학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敎育)이란 다른 지역에서 가질 수 없는 대명제(大命題)가 있었다. 이렇게 전국의 각계 전문가가 참여 하여 2년에 걸쳐 완성 한 것이 '논산 유교문화권 개발사업 기본계획‘이다.

하지만 이 사업은 의욕과는 달리 지지부진했다. 돈암서원을 비롯한 일부 지정 문화재사업을 제외하고는 큰 진척이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이완구도지사의 도지사사퇴였다. 도정이 공백이 생기면서 이 사업은 수면(水面) 하에 들어갔고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필자도 일말의 책임을 느껴 괴로워하다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고심 끝에 연구원에 나왔다.

이후 필자는 대학에서 전통학문인 한문을 가르치면서 앞서 말한 우리 기호유학의 큰 특징인 예학과 전통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예학의 기본과목인 소학(小學)과 예기(禮記)를 따로 공부하여 사계(沙溪)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하였으며, 종학당을 종종 찾아가 파평윤씨의 교육지침서인 ‘초학획일지도(初學畵一之圖)’와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보고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이후 필자는 예학의 기본과목서인 소학과 노성의 궐리사와 윤증선생의 교육방침 등을 참고해 졸저(拙著)인 ‘소학천도’라는 책을 내기도 하였다.   

이후 종종 언론에 충청유교문화원이라는 것이 논산에 유치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는 말로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변방에 있으면서 관계자들이 노력을 많이 하였고 ‘앞으로 잘 진행되겠지’ 하는 바람만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내가 그 분야에는 전문가인데 자문이라도 한번 오면 성심껏 도와줘야지’ 하는 일말의 기대심도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기쁨은 잠시, 유교문화원 부지를 놓고 지역으로는 노성권-연산권으로, 종친으로는 파평윤씨- 광산김씨가 힘겨루기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망차원을 넘어 망연자실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유교문화원 문제로 지역갈등을 넘어 당파싸움이 재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는 같이 서인(西人)으로 있다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조선후기사회가 우리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인 사색당파(四色黨派)라는 과거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선정된 충청유교문화원 부지는 양 측의 논란의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점에서 걱정하는 지역민들이 많다. 왜냐하면 부지선정을 하면서 공정하고 투명하여야 할 대상이 행정기관의 안일한 사고와 행정책임자인 논산시장의 미온적 대처가 지금의 화(禍)를 불러 왔다는 것이 중론이기 때문이다.

논산시에서는 이 문제가 지역문제를 떠나 기호유학유림의 전체인 관심사임에도 서둘러 노성의 종학당 인근에 부지를 선택하는 우(愚)를 범했다. 나중에 여론을 들어 지역민의 총의가 모아져야 함에도 무슨 이유인지 처음부터 종학당을 선호했다. 그리고는 논산시민 여론수렴을 위한 단 한 번의 공청회나 설명회, 전문가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논산시장의 애매한 처신이다. 이 문제는 원래 작년 지방선거 전에 확정되어 할 사업이었다. 당시 논산시장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가 불거지면 선거에 악영향(惡影響)을 끼친다는 판단을 해서인지 몰라도 슬그머니 선거이후로 넘겨버렸다. 불행의 씨앗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논산시장으로 유교문화원을 두고 노성민들과 어떤 뒷거래를 했는지는 몰라도 보수층이 쟁쟁한 이 지역에서 당초 알려진 여론보다 높은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아슬아슬한 표차를 유교문화원을 빌미로 성공했다는 것이 지역정가에서는 중론이었다. 이는 당시 이런 역할을 한 핵심이 파평윤씨 모(?)서기관이었으며 이후 돈암서원 측 유림들이 반발하자, 노성민들이 벌때 처럼 들고 일어나 현직시장에 대한 주민소환과 행정심판을 청구한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노성민들은 상당수가 유교문화원이 노성에 온다는 확신 하에 그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님의 말씀인 논어(論語)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불주)
  (군자는 두루 친하나 무리 짓지 아니하며
   소인은 무리 지으나 두루 친하지 아니한다 )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옛날에는 붕당(朋黨)을 만든다는 것이 최고의 악(惡)이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선생도 결국 ‘붕당의 괴수(魁首)’라는 미명하에 사약(死藥)을 마셔야 만 했다. 해서 예전부터 관료가 되면 최대관심사가 치적이 아니라 지역민간의 화합이 늘 우선이었다.

명판결로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송사를 없게 하는 것이 목민관의 임무였다. 하지만 이번 충청유교문화원 입지 선정 문제는 목민관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추겼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이 사태를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하다.

난 이 모든 문제가 논산시장에게 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책임지는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사직할 것을 정중히 권고한다.

요즘 매스컴을 보면 논산시가 행정을 잘 한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기업유치 실적이라든가, 복지행정 등 선두권으로 논산시민으로 어떤 때는 자긍심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무엇을 얼마나 잘 했는지 체감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오히려 상타기에 열을 올려 필요 없는 예산이 지출했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는 왜 그리 홍보는 많이 하는지. 공직자가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랑할 이야기는 아니다. 조용히 성실히 봉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필자는 연산에서 태워나 연산에서 살고 있지만 절대 돈암서원이나 연산면민의 편에 들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돈암서원하고는 학교다닐 때 소풍코스였고 방학 때에 고시공부한 인연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윤증고택과 종학당하고는 인연이 깊다. 역사문화연구원에 있을 때 윤증선생 관련 유물을 연구원산하 박물관으로 기탁하도록 관심을 표명했다. 이후 앞서 말한 것처럼 파평윤씨 가문의 교육방침에 관심을 두고 책을 쓰기도 했다. 유교문화원이 어디로 가던 훌륭한 입지로는 손색이 없다는 것이 내 견해다.

끝으로 정치권에게도 한번 묻고 싶다.

기호유교문화권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무엇을 했는지?
지난 2년동안 우리지역의 최대문제임에도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논산을 또 다시 갈등과 반목의 시대가 도래돼도 책임이 없는지?


이길구(논산시 연산면 어은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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