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위원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은 처음에 나를 낯 두꺼운 시정잡배인양 생각했다.

정치인 출신 교수들은 강의 중에 자기 자랑이나 하면서 강의 시간이나 채우고, 핑계가 되면 휴강이나 하고, 한 학기 진도는 책의 100쪽이 고작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필자는 첫 강의가 시작되면 비장한 마음을 갖는다. 42.195㎞ 마라톤 출발 때의 마음가짐처럼 이 책을 끝까지 강의하고 책을 다 끝냈다는 의미의 ‘책거리’ 이벤트로 학생들에게 피자를 선물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강의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예를 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강의에는 공자도 등장하고, 니체도 말하고, 당 태종도, 정도전도 끼어든다.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교수님 책 진짜 많이 읽으신 것 같네요”라고 말하며 “국회의원이 되려면 저렇게 유식해야 되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필자가 인문 관련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선거에서 낙선한 후부터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겪게 되지만 정치인에게는 선거만큼 큰 변화가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은 없다. 필자는 다섯 번 선거에 나가 세 번은 당선되고 두 번은 낙선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두 번째 낙선했다. 낙선하니 의원시절 그렇게 분주하게 만들었던 주위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 스스로도 사람이 싫어졌다. 대낮이 낯설었다. 일찍 집에서 나서고, 저녁 늦게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 마음까지 쓸쓸했다. 필자는 어느 누구도 친구를 해주지 않는 나에게 하루 종일 군말 없이 서있는 창문너머 보이는 가로등이라도 친구로 삼아야 했다. 사무실 한켠에 있는 책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달래니, 이내 10년 지기로 가까이 다가왔다. 책이 친구가 되었다.

필자의 독서방법은 이렇다. 한 번 읽으면 책 제목조차도 하루 지나면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꼭 4번을 읽는다. 처음은 대충 읽는다. 소제목을 기억하면서. 두 번째는 정독을 한다. 세 번째는 밑줄을 긋는다. 네 번째는 책제목과 밑줄 친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책을 남에게 소개한다는 생각으로 내용과 내 생각을 글로서 남긴다.

이렇게 하면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이 뭐지?” 하면서 네이버나 구글을 통하여 검색하면 금방 기억해낼 수 있다. 어떤 때는 깜짝 놀란다. 내가 쓴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허균의 ‘숨어사는 즐거움’에게 말을 걸었다.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다릴 때,
대나무 숲에 한 해는 저물어가고,
싸락눈이 내리고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간다.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고,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며,
간간히 종소리 들려오는 방안에서 난로를 끼고,
차 향기가 방에 가득하다.”

옛 선비의 유유자적함이 그림 그리듯 머리에 가득했다.

도심에 있지만 책에 빠지고 세상의 소식에 애써 귀를 닫으니 절간에 있는 것과 같았다.

중국 송대 정치인 왕안석이 한 말이 맞다.

“사람 사는 곳에 집 짓고 살지만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나?
마음이 멀면 절로 되는 것이라.”
(왕안석의 ‘학림옥로’)

흐린 날에는 찻집에서 자기인생 역정을 말하는 것과 같은 책을 만났다. 이 윤기의 ‘위대한 침묵’이다. 스스로 3등칸 인생이라 칭하면서 비록 한 번도 꽃으로 피어보지 못한 채, 잎으로만 살았으면서도 잘 살았던 사람이다.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오후에는 자기 이상형인 여자를 위한 모든 삶을 살아온 한 남자를 만났다. F.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이다. 단순하고 순수한 꿈꾸며 살아가는 남자. 그 꿈으로 현재의 비바람을 잘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비록,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게 사랑하지만 뼈아픈 실패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이 위대하다

인문학 책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이고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나서 보고 대화하는 존재이다. 세상이란 광야에서 책만큼 나를 일으켜주는 친구는 없다. 오늘도 아메리카 인디언은 책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하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