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석 특별기고] <2>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치

예로부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은 곳에서는 영웅호걸이 태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충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험준산령이 많지 않은 곳이지만 과거로부터 의로운 일을 하며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거나 한 평생 의리를 지켜 나라를 사랑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던 지역이다. 이는 지리학의 가설과 인물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흔히 충청도란 말이 충주와 청주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지명의 결합만으로는 충청도의 뜻을 설명할 수가 없다. 본연의 의미는 ‘나라를 위한 충(忠)과 맑고 깨끗한 기풍’의 청(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충청인의 기질은 ‘이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된 일이다’라고 판단이 서면 양심과 신념에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는 충절(忠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좌를 찬탈했을 때 단종 복위 활동을 하다가 가족 모두 처참하게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 성상문의 출신지역이 홍성이며, 성삼문의 동지이며 죽음으로 의리를 지켰던 박팽년이 태어난 곳도 대전 동구 가양동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야욕에 맞서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운 이순신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충남 아산에서 성장했으며, 한일합방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찬탈에 맞서 치열한 독립운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커다란 승전을 한 김좌진 장군의 고향은 홍성이었다. 3.1운동 때에 17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옥사한 유관순 열사 또한 충청도 출신이다. 이처럼 충청지역은 시대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비분강개하여 떨쳐 일어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정의롭게 행동했던 의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정3품 벼슬 지낸 ‘대쪽 선비’ 조부 슬하에서 자라

송좌빈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 대전 동구 주산동에서 태어났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11대 손인 그는 8세 때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영친왕의 시종관(정3품)을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왕세자의 비서실장과도 같은 시종관 자리는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영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직책이었다. 나라가 망하지만 않았더라면 요즘말로 미래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선생의 조부는 1907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었던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볼모로 강제로 끌려가는 상황을 보면서 조정으로부터 내려진 일본으로의 동행명령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하였다. 이때 만일 영친왕을 모시고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부귀영화는 물론이고 친일파의 거두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오늘의 송좌빈 선생을 만든 가문의 정신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선생의 조부는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와 자손들에게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민족주의 교육을 하였고 송좌빈 선생은 대쪽 같은 선비의 성품을 지닌 조부 슬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유년시절 그의 세계관은 조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희전문에서 민족주의‧자유주의 가치관 성숙

선생은 일제 때 5년제 대전중학교(대전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그 후 경성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고등교육을 받았던 학교는 경성제대, 보성전문, 그리고 연희전문이었다. 선생은 경성제대는 관립학교로 일제가 세운 학교이므로 진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선교사가 세운 자유로운 교풍의 연희전문을 선호하고 진학을 결정했다.

젊은 날 연희전문에서의 학창시절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연희전문의 교수진은 기라성 같은 한글학자인 최현배, 김윤경, 그리고 정인보, 백낙준, 이관용, 조병옥 박사 등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에 심취했던 석학들로 선생은 이들로부터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진정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이 만 20세가 되던 1944년은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이 멀지않은 시기였다. 전쟁의 막바지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수탈과 공출의 정도는 매우 극심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강제로 학병으로 징집되는 등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국내의 진영은 독립운동을 하는 저항세력과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친일세력으로 나뉘어져 분열의 와중에 있었고 총독부는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강요하며 강제징병과 징용을 선동하는 등 그야말로 암울하고 참담한 시기였다.

창씨개명‧강제징집 거부… 산중 은둔생활

그러나 선생의 집안은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압박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굴복하거나 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생에게도 예외 없이 강제징병 소집영장이 날아 왔다. 이때에 선생의 조부는 대청마루에서 소집영장을 갈기갈기 찢고서는 집안의 8대 장손인 손자에게 응소거부 명령을 내렸다 한다.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의기를 다지면서 쌀 한 말을 지고 지금의 민주지산 삼도봉 밑에 들어가 토굴을 파고 해방될 때까지 항일 대열에 서게 된다.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면 연기 때문에 은신처가 발각되므로 선생은 계곡의 물로 쌀을 불려 하루에 한 숟갈씩 생식을 해야만 했고 그 뒤 일본헌병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나병환자들과 함께 산중 은둔생활을 하면서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선생에게 각별한 의미를 주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은 그의 조부가 평소에 신념을 갖고 역설했던 말씀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고, 산중 토굴 생활로부터의 귀향은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해방은 이처럼 한반도 전체와 개인에게도 커다란 기쁨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은 다시 연희전문에 복학하여 민주주의 전반에 관한 학업에 전념하면서 정치외교학과 1회로 졸업하게 된다.

1960년대 한일국교정상화의 주역 이동원 전 외무부장관과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연대 정외과 3회와 6회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송좌빈 선생은 우리나라 정치학자의 원로로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또 다시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선생의 가족은 모두 피난을 가야만 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고향의 집이 모두 전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그 자체였다.

한국전쟁 참전해 무공훈장 3개 받은 ‘야당성향 정치장교’

이 후 선생은 노모와 처자를 고향집에 남겨놓은 채 단신으로 상경하여 북한공산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자진입대를 신청한다. 그러나 지원병의 학력을 살펴본 군은 선생을 일반 전투병과로 보내기보다는 정훈장교로 입대를 허락했다. 정훈장교로 입대한 선생은 군 장병에 대한 정훈교육뿐만 아니라 일선 소대장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여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무공훈장을 무려 3개나 받게 된다. (이후 국가유공자가 됨) 그러니 군에서의 선생의 인기는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어찌된 영문인지 선생에게 전역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는 자유당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그동안 3관구사령부, 논산훈련소 등의 정훈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장사병들에게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정훈교육, 즉 여당과 야당의 균형 잡힌 헌정질서와 언론자유의 필요성, 사사오입개헌이나 부산 프락치 사건 등 자유당정권의 독재 비판 등 정신 교육을 담당하면서 야당성향의 정치장교로 낙인찍혔다. 또한 전역만 하면 민주당에 입당하여 자유당에 대한 반독재 투쟁을 하리라고 공공연히 선언을 했던 터라 이를 예의주시 감시하고 지켜보았던 보안요원들에 의해 이미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유당 정부는 1954년 5월 20일 치러질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선생이 논산 지역구에서 출마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전역 일정을 고의적으로 늦추는 편법을 단행했던 것이다.

논산 국회의원 출마, 자유당 정권 군 전역 늦춰 불발

사실 선생은 전역 후에 논산에서 치러질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계획을 세웠기에 논산지역에서는 송좌빈 선생을 당선 1순위로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다. 왜냐하면 논산은 은진 송씨의 텃밭인 대덕군과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가가 광산김씨 사계 자손인 서포 김만중 선생집안이었고, 당시 군은 부재자 투표가 아닌 주둔지 투표를 했기 때문에 영외에 거주하는 직업군인들까지 포함하면 선생의 지명도가 단연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당선은 매유 유력해 보였다.

참고로 1954년 선거결과를 보면 자유당이 36.8%, 민주국민당 7.9%, 대한독립촉성국민회 2.6%, 대한국민당 1.0%, 무소속 47.9%로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 명망가의 당선이 매우 높았던 선거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명문대학의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청년장교로서 참신한 정치신인인 송좌빈 선생이 만일 논산에서 출마했더라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인 1956년이 되어서야 육군 대위로 전역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유당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역도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처숙 이순용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용은 일제 때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고, 1955~1956년 이승만 정부의 초대 외자청장(현 조달청장)을 지냈다. 당시 정일권 육군대장과는 친분이 상당히 돈독한 관계였기에 선생의 전역을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송좌빈 선생은 정일권 대장의 특명으로 군 입대 후 6년 만인 1956년에 전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당 독재에 분노…조병옥 박사 추천으로 정계 입문

군에서 전역한 후 송좌빈 선생은 곧바로 민주당에 입당해 야당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정치입문을 도와 준 사람은 천안 출신의 유석 조병옥 박사였다.

조병욱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민주당 대표를 맡았던 민주당 구파에 속한 정치인이었다. 또한 선생의 처숙인 이관용 선생(한국 최초의 스위스 취리히 대학 철학박사 1호)과는 친구사이로 신간회 멤버 등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지였다. 이렇게 해서 선생은 조병옥 박사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파란만장한 정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송좌빈 선생이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이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만든 사건으로 부결 선언된 개헌안을 자유당이 번복해 가결시킨 의회 쿠데타였고, 이를 본 선생은 정치참여를 결정한다.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실종을 지켜 본 선생은 이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길에 투신하게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치는 선생의 정치역정 속에서 평생 잃지 않고 일관되게 추구했던 가치였다. 다음 번 글에서는 죽천 송좌빈 선생이 민주주의를 향하여 걸어 온 정치인생의 외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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