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IMF 죄인’ 분명하지만…

김학용 주필
YS(김영삼)는 ‘IMF 죄인’이 된 이후 자신의 공적까지 잃어야 했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전직 대통령이었다. 그런 처지에도 ‘정적’ DJ(김대중)를 향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국민들 눈엔 나라 경제를 망치고도 후임자한테 불만만 쏟아내는 한심한 전직 대통령이었다.

그런 YS가 죽어서야 살아나고 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룬 공적을 옛 기억에서 꺼내 상기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에 대한 그의 공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렵다는 점에 공감한다. 우리는 민주국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국가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민주국가와 독재국가다. 오늘날도 독재국가가 적지 않다. 독재국가를 민주국가로 바꾸는 일도 어렵다. 미얀마의 영웅 아웅산 수치는 선거에서 이기고도 군부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다. 군부 정권의 종식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화 투쟁 앞장선 투사

YS는 그걸 해낸 1등공신이다. 그는 민주화에 앞장선 투사였다. YS와 DJ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였으나 싸움의 방식은 달랐다. 40대에 이미 대선후보가 되어 권력자의 표적이 된 탓이겠지만 DJ는 일본이나 미국에 나가 싸운 날이 많고, YS는 줄곧 나라 안에서만 싸웠다. YS가 1983년 민주화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이자 군부 정권은 출국을 권유했다. 그는 “나를 시체로 만들어 외국에 보내면 된다”고 일축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군부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하루 밤새 별 50개를 잘라내는, 이른바 ‘하나회 숙청’을 단행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이러다 또 군부가 나설지 몰라’ 하는 농담이 종종 나오긴 하지만 군부정권의 출현을 우려하는 국민들은 별로 없다. 국정 운영의 ‘독재 스타일’ 때문에 욕을 먹는 경우는 있어도 이제 과거 같은 독재권력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YS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YS가 전격 도입한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제 역시 많은 것을 바꿔 놨다. 검은 돈이 크게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고, 맘 놓고 돈을 챙기던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로 만들었다. 금융실명제는 YS 자신의 아들조차 피할 수 없는 덫이 되고 말았으니 개혁의 효과는 증명된 셈이다.

국민들의 싸늘한 눈초리만 받던 ‘IMF 죄인’

이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IMF 죄인으로 물러난 YS는 국민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IMF 사태로 많은 국민들 상당수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YS는 나라를 그렇게 만든 무능한 대통령일 뿐이었고, 후임자 DJ는 그런 나라를 나락에서 건져올린 대통령이었다.

두 사람은 IMF 문제로 크게 대비됐다. 한 사람은 나라 경제를 망친 대통령, 또 한 사람은 망가진 경제를 되살린 대통령이 됐다. 이는 YS에 대한 커다란 공적까지 지워버렸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마다 YS가 꼴찌를 면치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은 빚을 내서라도 좋은 집을 사면 결국 부자가 되고, 기업은 사업이 시원찮아도 외형만 키우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돈은 못 쓰는 게 바보였다. 그러나 남의 돈이 무서운 건 몰랐다. 대통령도 국민들도 거품경제의 위험성을 잘 몰랐다. IMF 사태가 온 국민에게 충격적으로 알려준 뒤에야 알게 됐다. 

여야 국회에는 IMF 책임 없었나?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게 YS만의 책임인가 하는 의문은 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일주일 전인 1997년 11월15일자 <연합뉴스>는 “금융개혁법안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을 경우 악화되어온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추가 하락하는 등 엄청난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날엔 “금융개혁법안 국회통과가 사실상 물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야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관련 법률안 처리에 반대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금융개혁법 처리에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 의원들도 반대했다. 아마 그게 ‘대선 계산법’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런 뉴스는 일반 국민들에겐 와 닿지 않았다. 그때까진 IMF가 뭔지 잘 몰랐고 모두들 대선 정국에 빠져 있었다. IMF 사태가 본격적으로 터진 후에야 심각성을 알았고 분노한 국민들은 YS한테만 손가락질을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정권이 바뀌었지만 IMF 사태의 진상을 캘 사람도, 캘 이유도 없었다.

YS가 고인이 되자 IMF 사태에 대한 ‘야당 책임론’도 나오고 있다. 노동개혁 저지 등 당시 야당의 비협조를 YS 측이 원망하기도 했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야당 탓은 국정운영자의 변명일 수밖에 없고 YS는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국민들은 IMF의 진상을 이제라도 충분히 알 필요가 있다.

‘3당 합당’도 YS의 치적을 갉아먹는 요소였다. 권력에 눈이 멀었다 해도 민주 세력이 어떻게 ‘독재 권력의 잔당’과 손을 잡을 수 있느냐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는 게 YS의 변명이었다. 그는 그 굴에 들어가 대통령이 되었고, 전임 군부 권력을 심판대까지 세움으로써 3당 합당은 어느 정도 명분을 갖게 되었다.

‘머리는 빌려도...’ 조롱도 받았지만 YS의 그늘 커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YS의 말은 그를 조롱하는 말로 쓰였다. 열심히 뛰기만 하다가 IMF를 맞았다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머리를 빌리고 도움을 받기 위해 끌어들인 정치인들이 지금 대한민국 정치를 움직이고 있다. 그 중 두 사람은 대통령까지 되었다.

인재를 찾고 키우는 일은 정치인으로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그 점에서 현대사를 장식한 정치인 가운데 누구도 YS를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이완구 전 총리는 YS의 빈소를 찾아 자신도 YS가 발탁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고향의 정치선배 JP의 휠체어를 밀던 그였지만 ‘YS의 문’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충청인들에게 YS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다. 둔산의 정부3청사 착공이 김영삼 정부 때 이뤄졌다. 3청사의 대전 이전을 오래 전에 결정해놓고 착공이 미뤄지던 상태에서 당시 염홍철 시장의 ‘재촉으로’ 착공을 앞당겼던 듯하다. 염 시장은 YS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실상 마지막 관선시장으로 내려왔다. 그도 한때는 YS의 그늘에 있었다는 의미다.

YS의 청렴성은 가려져 있었다. 자신이 구속까지 시켜야 했던 아들의 허물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깨끗한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국민들은 이번에야 알았다. “내 지갑은 지나가는 정거장”이라던 YS어록의 진실성에 대한 증언들이 잇따랐다. 그의 청와대 칼국수는 ‘불어터진 칼국수’로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국민의 눈을 속이려는 겉치레는 아니었다. 그가 정말 맛있게 먹던 서민 음식이었다.

누구든 공과 과가 있다. YS는 퇴임후 거의 ‘IMF 죄인’으로만 살아왔다. 그가 세상을 뜨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을 하던 그의 모습이 국민들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인기가 없던 YS 회고록이 재출판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공이든 과든 사실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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