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대전 정치인들과 좌절감에 빠진 시민들

김학용 주필
충북 정치인 가운데 정종택 씨가 있다. 지금은 충북의 원로다. 장관 4번에 국회의원 3번 한 인물로 올해 82세다. 40년 전에 충북도지사를 지냈다. 청주고를 나오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지만 고시엔 낙오자였다. 사법고시에 두 번 실패하고 내무부 촉탁직(계약직)으로 공무원이 됐다. 그 후 17년 만에 충북도지사가 되었다. 초고속 승진자였다.

공직 입문 17년 만에 도지사 된 고시 낙오자 정종택

그에 대해 더 아는 건 없다. 다만 한 신문에서 ‘뭐든 했다 하면 뿌리를 뽑는 성격이고 성격도 화끈하고 친화력이 높다’고 소개한 인물평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 있다. 공직사회에선 공무원 시절에도 매일 국회의원 한 명씩을 만나러 다닐 정도로 일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필자의 관심은 ‘정치인 정종택 씨’가 아니라 ‘정종택 씨 같은 지역 정치인’이다. 대전이 근대 도시로 탄생한 이후 100년 만에 처음 가장 큰 좌절감을 맛보고 있는 서대전역 문제를 ‘복기(復棋)’해 볼수록 충북 정치인들의 역할이 자꾸 부각된다. 정 씨는 그 중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 지역 정치인이 없었다고 해도 과연 충북이 지금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꿈틀대는 지역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호남고속철도 오송 분기역 유치에 성공한 충북은 지금 활기에 차 있고, 교통도시의 위상을 잃게 된 대전은 커다란 좌절감에 빠져 있다. 대전과 충북의 엇갈린 운명을 초래한 호남선 분기역 문제에 충북 정치인들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충북의 ‘오송분기역 유치 성공기’는 제법 알려져 있다. 충북 언론의 기사에는 오송분기역 유치 성공의 비화가 소개돼 있다. 정종택 당시 여당 국회의원은 ‘경부고속철도의 청주 통과’를 노태우 대통령후보 공약집에 넣었고, 노 후보는 청주에 가서 ‘청주역 설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천안에서 조치원 서쪽을 거쳐 대전으로 내려오는 노선을 계획하고 있었다.

경부선 철도 점거 ‘폭탄 거사’ 기획해 청와대 압박한 여당 정치인

충북 도민들은 대통령 공약임을 강조하면서 충북 경유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충북도민들은 결사 항전에 나섰다. 이상록 경부고속철도 유치추진위원장은 “오송(청주)으로 오지 않으면 부강~내판 간 협곡에 3톤 트럭으로 폭탄을 실어 폭파시키겠다”며 공공시설물이 파괴되지 않도록 재고하라고 서면으로 요구했다. 그는 감옥까지 가겠다는 각오로 ‘거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점은 ‘폭탄 거사’가 당시 여권 현역 정치인(정종택)에 의해 기획됐다는 것이다. 한 충북 언론은 비화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때 정종택 씨는 추진위 관계자들을 설득해 한 가지 거사를 계획한다. 경부선의 청원 부강터널을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유치위 관계자들은 처음엔 놀랐으나 취지를 알아차리고 당장 행동에 들어갔다. 느닷없이 부강터널 현지에 나타나 사진을 찍으며 법석을 떨자 이는 곧바로 청와대와 정부 부처로 보고됐고, 긴급 대책회의까지 열리게 된다.”

결국 충북은 당초 계획에는 없던 경부선을 끌어들이며 오송역을 만들고, 나중엔 호남선 분기역 유치까지 이끌어냈다. 오송 분기는 승객 수요에서도 선형 측면에서도 가장 불리한 안(案)이었다. 지금의 경부고속철도 노선을 보면 천안~대전 구간이 위로 올라가 있고, 호남고속철도 노선도 내륙으로 움푹 들어가 있다. 지독한 지역이기주의 탓에 고속철도를 망쳤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역의 이익이 걸린 문제를 스스로 양보하는 곳은 없다. 충북은 최선을 다했고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곳이 비정상이다. 대전은 중증의 비정상 도시다. 호남선을 빼앗길 때도 무대책이더니 마침내 대전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이 시점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다.

경부고속철도 노선을 보면 천안~대전 구간이 위로 올라가 있고, 호남고속철도 노선도 내륙으로 움푹 들어가 있다. 전적으로 ‘충북의 힘’이 발휘된 결과이고 그 중심에 지역 정치인이 있었다.

펄펄 나는 충북, 암울한 대전

호남고속철도 개통 이후 호남선 최대 이용객을 자랑하던 서대전역은 간이역으로 전락하고 있고, 간이역에 불과했던 오송역은 이제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한 지인은 “광주에 자주 출장을 가는데 이젠 오송으로 올라가서 KTX를 타고 다니는 실정”이라고 했다. 서대전역 부근에서 숙박업을 하는 한 사람은 “KTX가 끊기면서 전기세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대전시민의 불만이 터져 나와야 정상이다. 대전시장도 지역 국회의원들도 조용하다.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서대전역 주변 상인들조차 속으로만 비명을 지를 뿐이다. 심각한 비정상이다. 설 전에 있었던 한 모임에서 지인은 “오송은 펄펄 나는데 대전은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대전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호남선 이탈’은 대전 역사상 가장 심각한 문제다. 나설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먼저 나서야 할 사람들이 있다. 대전시민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거나 그 자리를 향해 뛰는 정치인이라면 침묵할 수 없는 문제다. 4월 총선이 임박하면서 서대전역 문제를 표심에 호소하려는 정치인은 간혹 눈에 띄지만 ‘정종택 같은 지역의 리더’는 안 보인다.

충북은 잘 뭉쳐서 성공하고 대전은 못 뭉쳐서 실패하나?

대전과 충북은 운명이 바뀌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대전과 충북의 ‘지역성 차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충북 사람들은 잘 뭉치고, 충청과 영호남이 합쳐진 도시 대전시민들은 그렇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 그런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충북에 ‘폭탄 거사’까지 기획하는 정치인이 없었고, 감옥에 갈 각오로 행동에 나섰던 시민대표가 없었다면 충북이 단결하고 오송역을 유치했을까?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노태우 정권이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기치로 내걸고 탄생한 건 맞지만 당시만 해도 여권 인사가 청와대에 압력을 넣기 위해 ‘폭탄 거사’를 기획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충북엔 그런 정치인이 있었고 호남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작년 대전과 광주가 맞붙은 ‘KTX 서대전역 경유 논란’은 호남 사람들의 청와대 상경 시위 한 방으로 끝이 났다. 그때 대전 정치인들은 대전역 앞에서 ‘안방 시위’ 한 번 하는 것으로 때웠다. 그나마 일부 정파와 시민단체들만 모인 시위였다. 대전은 반드시 힘을 합쳐야 할 때도 여야가 따로 논다.

폭탄 거사나 청와대 시위로 해결하자는 건 아니다. 그런 방법으로 꼭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거사나 시위는 지역 문제에 대한 절박하고 절실한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억지춘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전에도 폭탄 거사를 꾸밀 정도의 배짱을 가진 정치인이 왜 없겠는가? 설마 청와대 시위조차 못할 정도이겠는가?

지역 문제에 마음 없는 대전 정치인들.. 대통령도 여도 야도 150만 시민 눈치 안봐

대전 정치인들은 지역 문제에 - 신경이 쓰이는지는 몰라도 - 마음이 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전시장이란 자리나 국회의원 금배지와, 그것을 통해 얻는 이권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 아닌가? 최근에도 그 증거가 나왔다. 지난 4일 대전역(한국철도공단)에서 열린 국가철도망구축계획 공청회에 경기도 국회의원은 2명씩이나 왔지만 대전 정치인들은 한 명도 안 보였다고 한다. 지역경제를 걱정하는 대전 상인들이 참석해서 대전을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서대전~논산 철도 직선화는 서대전역을 조금이라도 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만 정부는 ‘후보사업’으로 지정했다. 사실상 물건너가는 분위기다. 지역 정치인조차 이렇게 무관심한데 어떤 정부가, 어떤 당이 대전에 관심을 갖겠나? 대통령도 여도 야도, 그들이 하는 말과 정책을 보면 150만 대전시민 눈치는 안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대전은 이제 여든 야든 선거 때 표만 주우러 다니는 동네가 됐다. 쪼그라드는 서대전역이 그 상징물로 변하고 있다. 지역 정치인들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전현직의 대전시장과 지역 국회의원들 책임이 가장 크다. 충북 정치인들의 역할을 보면 분명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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