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권의 영화칼럼] 배재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영화 <귀향>의 반향이 뜨겁다. 오래 전 벌어졌던, 그러나 현존하는 타인의 아픔을 마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열네 살 소녀들이 겪었던 아픔이 나를 잡고 놓지 않았다.

간혹 보도 매체를 통해 비춰지던 그녀들의 애달픈 눈빛을 애써 회피하며 일상을 영위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어두운 영화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내가 동굴 속에 숨은 나약한 짐승처럼 느껴졌다.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가슴이 그녀들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슬픔으로 소비되고 말아 버릴 카타르시스인지 모를 만큼 나는 영화에 몰입했다.

그때 내 귓가에 오도독하며 팝콘 알갱이 먹는 소리가 박혔다. 어린 소녀들의 처절한 아픔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옆 좌석의 낯선 이는 팝콘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 무신경함이 거슬렸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우겨 넣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나의 감정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계속 팝콘을 우물거렸고, 영화는 자신이 하려 했던 말들을 조근 조근 풀어나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감정은 분노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낯선 사람에게 분노하는가. 일제의 강점에 의해 벌어진 소녀들의 수난사나 그들의 반 토막 난 ‘유감’의 말에다 대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옆 사람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비틀어진 역사관에 분노하지 않고 이념도 사상도 삶도 전혀 모르는, 어쩌면 이 영화의 아픔에 누구보다도 깊이 공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옆 사람에게 분노라니. 그는 단지 팝콘을 우물거렸을 뿐인데 말이다.

그것은 그의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질문에 다다르자 분노는 삭아들었다. 대신 그 자리엔 열패감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화를 내는가를 자문하고 괴로워하던 어느 시인의 깡마른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내겐 쉽게 화내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을 더러 버릇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느 때부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나름대로 상식의 선을 그어놓고 그를 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상대방을 매도했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괜한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 분노는 고스란히 모여 나를 좀먹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영화관 한 귀퉁이에 앉아 나를 파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분노라는 것이 나에게만 들러붙어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미 이 영화와 팝콘의 상관계수에 관한 문제는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리고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

사람들은 이제 쉽게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의 칼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하다. ‘가만히 있으라’던 권력의 목소리가 그 허상을 들켜버린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허나 손에 쥐어진 것은 분노 밖에 없었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분노를 휘두르는 일이 고작이었다. 휘둘러봤자 그 상처는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누구를 향해 분노하는가. 그리고 그 분노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분노가 가슴 복판에 맺혀 풀어지지 않는 사람은 그 분노가 내뿜는 뜨거운 기운에 잠식당하고야 만다. 우리는 그 분노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분노와 내가 바투 붙어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너무 쉬운 도식이지만, 이를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를 바라보는 나’를 완성하는 것은 그 유명한 철학자도 쉽게 해내지 못한 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던 철학자는 이제 죽고 없다. 나의 존재를 확정하기 위해 생각하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기어코 분리해 버린 그는 이제 없다.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나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가. 고작 팝콘 먹는 소리에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을 더러 여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타인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나의 아픔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 했다. 너의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 한다던 날 선 문장을 기억한다. 고통스럽지 않을 것, 그래야만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다. 그래야만 타인의 고통 앞에서 태연하지 않을 수 있다.

분노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어두운 동굴에서 걸어 나와 탁 트인 광장으로 향하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렇게 쉽게 일어났던 분노를 가라앉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귀향>에 보일 수 있는 내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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