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국민은 무능보다 오만이 더 싫다

김학용 주필
선거 전날 박근혜 대통령은 ‘일하는 국회’를 강조하며 또 한번 국회를 비판했다. 투표할 생각이 없었다가 이 말을 듣고 투표장에 간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선거 다음날 지인 두 명한테서 같은 얘기를 들었다. 대통령의 국회 발언을 듣고 투표장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그래도 박 대통령을 이해해주려는 쪽의 사람들이다.

대통령 국회 비판 보고 투표장으로 갔다는 사람들

대통령의 국회 비판은 ‘선거의 여왕’이 저지른 또 하나의 실수였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민생안정과 경제활성화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회가 탄생해야만 한다”고 했다.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선거 전날 대통령의 국회 비판은 권력자의 오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권력자의 오만과 야당의 무능, 둘 중 하나를 응징하라는 게 이번 선거의 줄기찬 요구였다. 여야의 공천 파동은 차마 못 볼 지경이었다. 특히 여당은 당대표가 옥새를 갖고 튀는 소동까지 빚으면서 결국 일부 지역구는 당 스스로 공천을 포기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야당(더민주)은, 당 안에는 문제를 풀 사람이 없어서 생각도 과거도 다른 외부인을 데려다 칼자루를 쥐어줘야 했다. 결과적으로 외부인 영입은 성공한 셈이지만, 뒤집어 보면 더민주는 너무 무능해서 이긴 선거가 됐다. 야당이 이렇게 무능하지 않으면 여당도 저렇게까지 막갔을까 싶다.

선거 결과 여당은 2당으로 내려앉은 참패였지만 여당이 이긴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180석까지 기대하는 전망도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이번 선거는 일여다야 구도였다. 더구나 상대는 선거만 하면 지는 ‘약체 야당’이었다. 여기에다 야당에서 분당해 나간 제2 야당과 서로 치고받는 상황이 전개됐다. 여당이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는 선거였다.

선거는 누군가를 지지하기보다 응징하는 행사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이 여당의 자멸로 이어졌다. 여당의 공천 파동은 권력자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배신자 찍어내기 과정’이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중계됐다. 배신자를 응징하고 싶은 건 모든 권력자들의 솔직한 심정이겠지만 국민들 앞에서 보란 듯이 배신자를 처단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선거는 누군가를 선택하는 행사지만 그 내용을 보면 누군가를 응징하는 선거가 많다. 그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다. 호남 사람들은 이번에 더민주를 응징하기 위해 국민의당 후보를 찍었고, 수도권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의 오만을 응징하기 위해 더민주 후보를 찍었다.

힘이 있는 자는 오만하기 쉽고, 힘이 부족한 자 중에는 무능한 자가 많다. 정당도 후보자도 이런 경우가 꽤 많다. 이럴 때 국민들은 어느 쪽도 흔쾌히 선택할 수 없지만 오만한 정당에 대해 더 자극을 받는다. 무능한 정치는 잠깐은 참을 만하지만 오만한 정치는 바로 국민들을 분개시킨다.

작은 권력의 오만도 국민들엔 큰 허물

오만이 최고 권력자만의 허물은 아니다. 유권자들은 약체 후보의 오만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TV토론회에 함께 나왔던 이정희 씨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당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그의 말은 거꾸로 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19대 총선 때는 다들 이긴다던 야당이 오히려 역전패를 당했다. 역시 오만 때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선적 국정운영으로 여당 스스로도 심판을 각오하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야당이 이긴다고 봤다. 이 때문에 여당은 몸을 낮췄지만 야당에선 막말이 줄을 잇고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승리한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선거는 승패가 뒤집히기 마련이다. 이번 총선도 여야가 바뀌었을 뿐 원인은 같다.

선거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후보, 크게 이긴다는 정당이 오히려 크게 패하는 건 대개 오만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이걸 알기 때문에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 설사 가식이라도 그렇게 해야 유리하다. 이번 선거에서 여권은 가식적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 대표가 옥쇄를 갖고 튀고, 나중엔 후보자들이 무릎을 꿇고 사죄했지만 소용없었다.

총선은 본래 현재 권력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크다. 평가 대상자인 권력자가 오만한데 그 아래 사람들이 뒤늦게 석고대죄 해봐야 소용없다. 여당에게 이번 선거는 대통령이 망친 선거다. 2014년 지방선거 때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으로 상황이 힘들어지자 눈물로 호소했다. 다 뒤집어진다는 그 선거에서 여당은 그래도 반타작은 하며 선방했다.

선거 결과 인정하지 않는 청와대의 오만

대통령은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갔다. 청와대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두 줄 논평을 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이고 국민에 대한 반발이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오만할 수 있는 권력이란 말인가?

오만한 권력이 자신의 오만을 숨기는 것도 위험하지만 국민들에게 오만을 숨기지 않는 권력은 이미 권력에 취한 권력이다. 오만은 권력자의 가장 큰 약점이다. 상대를 우습게 알고 국민을 우습게 아는 권력의 귀결점이 어딘지는 정당공천 과정과 선거 결과가 알려주고 있다.

오만은 종종 선거 결과를 완전히 뒤바꾸는 결정적 요소다. ‘구도’가 유리하고 ‘바람’이 불고 후보의 ‘인물’이 좋더라도 그 정당, 그 후보가 오만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선거에서 낙선하는 후보, 패배하는 정당이 정치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많다.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 당선된 후보들이 오만의 유혹을 견디는 건 쉽지 않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이번 선거에서 선전하고도 내년 대선에서 실패한다면 그 또한 오만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승리와 선전은 오히려 독이 되는 셈이다. 오만한 권력은 그 권력이 크든 작든 패배하게 돼 있다. 이번 선거는 그것을 또 한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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