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진호 전 대전시립연정국악원장

연정 선생님! 신묘년(2011) 새 아침에 당신께 글을 썼으니까 올해로 꼭 5년 만에 당신에게 이렇게 또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신묘년에 당신께 글을 썼을 때는 ‘연정 선생님 대전에도 국악당을 짓습니다’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썼는데 오늘은 ‘그곳을, 다시는 찾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다소 서글픈 제목으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살아생전 같았으면 “10년이나 대전시립연정국악원장으로 재직했던 놈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불호령이 떨어졌을 텐데 이제는 그런 꾸지람조차 들을 수가 없는 하소연을 늘어놓습니다. 연정 당신께서 평소 그렇게 소망하던 대전국악당은 작년 6월에서야 준공을 했습니다.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이 지금의 한밭수목원 부지에 신축되기까지는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대전시청사가 둔산동으로 이사를 해 가뜩이나 공동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데 예술의전당에 이어 대전국악당까지 둔산동으로 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여론의 질타와 한밭수목원을 훼손한다는 환경운동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넘어서기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원장인 저는 전통음악의 관광 상품화를 위해 가급적 국악당을 대덕연구단지 가까운 곳에 지어야한다고 천둥벌거숭이마냥 뛰어 다녔습니다. 천의신조인지 대전국악당 부지가 한밭수목원으로 결정되는 것까지만 보고 저는 2011년 6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대전연정국악원 한옥으로 짓기 바랐는데

대전국악전용극장은 서울남산국악당처럼 전통한옥으로 아담하게 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덕수궁 돌담길 같은 그런 고샅길을 통해 국악당으로 들어서면 한국식 정원, 그 안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그런 고풍스런 국악당으로 말입니다. 대청마루에 앉아 공연도하고 정원 한 편에서는 마당놀이도 할 수 있는 그런 엣지(edge) 있고 품위 있는 국악원, 고대광실 같은 국악당과 어우러진 한밭수목원 그 자체가 곧 관광상품으로 대전시민은 물론 대전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국악과 아름다운 한옥의 예술성까지 선사하는 그야말로 대전제일의 관광명소로 지어졌으면 좋겠습니다.(대전예술 2011.1월호)
 
연정선생님! 한시라도 빨리 국악당을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그마한 연못과 석등도 듬성듬성 있는 한국식 정원에, 서울 남산국악당처럼 그런 엣지 있는 전통 한옥으로 지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국악당이 완공되면 연정국악원이 지난 30년 동안 해왔던 찾아가는 공연, 초청공연, 국악강습 등은 이제 지역 예술단체의 몫으로 돌려주려 합니다. 그리고 연정국악원은 첨단과학도시 대전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문화아이콘으로 변화를 시도하려 합니다. 국악전용극장을 마련하게 된다면 국내외 관광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전국 제일의 민족문화의 전당으로 키워낼 자신이 있습니다. (중도일보 2011. 1.17 )

연정국악원 30년의 꿈! 일개 팀장에게 짓밟혀

그렇습니다. 연정선생님! 당신이 전 재산을 대전시에 쾌척하시면서 1981년에 전국 최초로 탄생시킨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은 이제 중부권 제일의 국악전용공연장을 마련하고 한반도를 넘어 오대양 육대주로 비상할 채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도 열정을 바쳤던 대전연정국악원을 다시는 찾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퇴직을 하고나면 옛 직장을 다시 찾지 않는다는 세간의 속설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연정국악원을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서울남산국악당처럼 전통한옥으로 지었으면 하는 환상이 깨진 탓이고, 두 번째는 국악관현악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의 모습이 서글프기 때문입니다. 

연정 당신께서는 생전에 국악관현악을 유난히 싫어하셨지요. 관객 눈높이만 맞추느라 관현악을 치중하다보면 자칫 전통성(정악, 정재, 민속)을 잃고 창작국악단으로 전락해 버린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임지휘자가 예술감독을 겸하게 되면 국악원이 관현악단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단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상임지휘자가 예술감독을 겸하도록 연정국악원운영체계를 뒤 흔들어놨기 때문입니다. 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 시립무용단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시장직속기관인 사업소를 쥐고 흔들어대는 데도 이를 통제하지 못한 대전시문화예술행정이 원망스러운 뿐입니다.  

수처작주(數處作主) 정신으로 연정국악원 혁신

지방의회 전문위원에서 연정국악원으로 발령이 났을 때 국악의 ‘국’자도 모르는 사람을 국악원으로 보냈다며 사령을 거부했던 제가 어떻게 10년 동안 원장의 직무를 수행했는지 지금 돌이켜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30년 전 성취동기가 30년 후 성공여부를 결정한다는 진리를 쫓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도록 국악사랑에 흠뻑 빠진 대전시립연정국악원 대전 시민을 문화의 국빈으로 받들어 모시려던 연정선생처럼 우리 모두는 지나온 스무 해보다 앞으로의 10년을 더욱 성심껏 준비하겠나이다. 부임 4개월 만에, 개원 20주년 공연초대의 글을 이렇게 쓰면서 나는 수처작주를 마음속 깊이 다짐 또 다짐을 했습니다.

수처작주(어느 곳이든 가는 곳의 주인이 된다는 뜻)라는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이 말이 사령장받기를 거부했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누군가가 열정을 바쳐 국악의 대중화, 국악의 세계화를 이룩해야한다면, 정년까지 10년의 임기가 보장된 내가 기필코 대전연정국악원을 혁신하는 주인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먼저 오디션 점수가 높으면 신입 단원들도 간부단원이 될 수 있도록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제도를 혁파했습니다. 나이만 먹으면 간부 공무원으로 승진하는 구습을 깬 셈이지요. 두 번째로 찾아가는 공연을 행사성격에 맞는 맞춤형공연으로 바꾸면서 국악원운영을 시민친화적으로 개선했습니다.

10년 만에 국악계 롤 모델 된 대전연정국악원

세 번째는 연정국악원 직원들이 독식하고 있는 국악시장을 사설학원과 프리랜서들에게 돌려주는 개혁을 서둘러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전국악시장에 승자독식현상이 만연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값싼 수강료 때문에 수강생이 연정국악원으로 몰리는 현상이 단원들의 개인레슨으로 연결하는 통로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쯤 되다보니 연정국악원과 단원들은 대전국악계의 미운 오리새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단원들의 개인레슨, 외부출연, 출강, 등을 통제하고 국악원 본연의 업무에만 정진하도록 근무기강을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경제활동과 직결되는 일이라 단원들의 반발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네 번째는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라 신분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매 2년마다 오디션을 보고 재임용한다는 이유로 민족음악을 지킨다는 자긍심에도 불구하고 시립예술단 중 최하위대접을 받는 단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먼저 단원들이 패용하는 ‘단원증’을 ‘공부원신분증’으로 바꾸도록 조례를 개정해서 단원들의 신분이 공무원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엔 전국 최초로 대전연정국악원 단원들이 지방행정공제회 회원자격을 취득하게 해주었습니다. 1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대전시립예술단은 물론 여타 국공립예술단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유일의 특권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국악의 관광상품화 실현한 화요상설공연

다섯 번째는 격조 높은 우리의 민족음악을 첨단과학도시 대전의 마이스산업 성공 포인트가 될 관광상품으로 접목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전국최초의 화요상설공연을 기획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예산부족으로 격에 맞는 의상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하고 공연소품도 태부족인 상태로 상설공연을 이끌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공연소품과 의상들은 시립무용단에서 빌려다 쓰고 그래도 부족한 의상은 윤정의상실(서울에 소재한 20여년 거래처) 사장에게 부탁해 외상구매로 해결할 수가 있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어렵고 힘들었던 일은 프로그램에 투입할 인적자원부족 문제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립국악원정도는 돼야 편성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그 반에 반도 안 되는 연정국악원 인적자원으로 소화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 말입니다. 단원이 아예 없거나 부족한 파트는 국립국악원이나 프리랜서들로 충당하면서 조금씩 공연의 품격을 높여나갔습니다.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화요상설공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화요상설공연은 대덕연구단지를 찾는 내․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대전제일의 관광상품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연정국악원화요상설공연 성공신화는 이렇듯 저와 60여 단원들이 맨손으로 일군 감동스토리이자 대전국악당을 신축하게 한 일등공신입니다.  

30년 전통을 깨트린 ‘상임지휘자 예술감독제’

그렇습니다. 지금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아련히 잊혀져가고 있지만, 연정 임윤수선생께서 대전시에 기부한 국악 관련 소장품 4만5,000여 점을 모태로 설립된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은 지방정부 최초로 쏘아올린 국악대중화의 봉화(烽火)였고, 민족문화를 부활시킨 한바가지 시원한 마중물 이였습니다. 우리의 전통음악이자 민족문화인 국악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서양음악만을 보편적 음악으로 여기는 골 깊은 문화사대주의를 청산해야한다며 1981년 지방정부 최초로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을 탄생시킨 연정 임윤수 선생의 국악 사랑이야기는 그래서 여태껏 우리의 전통음악인 국악을 민족문화로 부활시킨 전설로 회자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상임지휘자가 예술 감독을 겸하면서 대전연정국악원이 점점 국악관현악단으로 전락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상임지휘자가 예술감독까지 겸하게 되면 필연코 국악관현악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단원들의 진심어린 충고를 매너리즘에 빠진 얼빠진 사람들의 넋두리로 매도하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대전시 문화체육국 관계자는 하루빨리 대전연정국악원 정상화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민족음악의 바른 전승을 위한 자문기구도 구성해 시·도립국악원의 자존심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이 다시는 이렇게 시류에 휘둘리지 않을 대책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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