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구 기고] 식민사학계와 진보학계에게 보내는 글

진보적 역사연구단체로 알려진 역사문제연구소가 올해 들어와서부터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최근 발간한 계간지 ‘역사비평’ 여름 호에 유독 세 사람의 신출 연구자들의 글이 눈에 띄는 것은 필자만의 의아심이 아닐 것이다. 이른바 재야사학계를 비판하는 논문 3편이 지난 봄 호에 이어 또 실린 것이다.

이찬구 철학박사 | 전 가톨릭대 강사

지난 봄 호에서는 낙랑 위치 문제, 식민사학 등에 대해 해방이후 줄기차게 주류학설을 비판해온 재야학자들의 주장을 뭉뚱그려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더니 이번에는 두 번째 순서로 그 수위를 높여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모든 역사학을 생뚱맞게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매도하면서 다방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6편의 논문을 게재한 6인의 투고자들은 사전에 그 분야 중진학자들과  충분히 논의를 마친 듯, 공통적으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지목하여 ‘사이비역사가’로 몰아 부치고 있다.  

그런데 언필칭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의 그룹이 운영한다고 표방해왔던 역사문제연구소가 그들이 척결의 대상으로 지목해야 마땅할 식민사학자들의 투고를 오히려 줄줄이 받아주고, 나아가 이에 대한 일체의 반론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겉으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척 했지만 이들도 내심으로는 식민사학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진보학자의 한 사람인 강만길 교수는 1985년 「일제시대의 反식민사학론」에서 “신채호 사학 역시 일본 어용사학의 역사왜곡에 정면으로 맞선 반식민사학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지만, 또 그 때문에 갖는 제약성도 많았다”면서 단재의 사학을 ‘관념적, 정신주의적 성격이 짙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단재가 지나치게 단군을 받들어 민족의 신성성 등을 강조하였다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이로부터 단재가 주장한 민족사학의 상징인 ‘대륙 고조선론’과 ‘한사군 한반도 부재론’도 진보진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신채호를 사실상 역사학계에서 도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강만길 교수의 이런 주장과 그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이병도와 신석호를 친일행위자 명단에서 빼 준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일까?(『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가 있지만)

강만길 교수가 단재 역사관을 비판하고 나설 무렵 국회에서는 국사교과서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학계에서는 이기백, 김철준, 김원룡 교수 등이 나갔고, 재야학자를 대표해서는 안호상, 박시인, 임승국 교수 등이 나갔다. 공청회가 정상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은 일견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양측 사이의 역사관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괴리가 깊었던 것이 핵심 요인일 것이다. 이후 강단사학계는 공청회의 주제와 관계없는 내용들로 재야사학계를 몰아부쳤다.

강단사학계는 나아가 몇 가지 지엽적인 문제를 침소봉대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몰고 갔다. 이른바 일부 진보학계도 여기에 가세했다. 필자가 의문을 갖는 것은 이른바 진보학계가 단재 사학이 어떤 내용인지, 『환단고기』의 실제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강단사학계에 동조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고대 강단사학계의 핵심이론이라는 것이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우리 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에 동조한다는 것은 진보라는 용어의 자기부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른바 진보학자들은 신채호 학설에 눈을 감았고, 식민사학의 주장에도 암묵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진보진영이 조선총독부 학설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에게 백만원군이 되었다. 김상태의 지적처럼 강만길 교수의 이 한마디가 강단 사학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적(신채호)의 무덤을 파내서 부관참시를 한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강만길 교수는 신채호에 대한 이런 폄하가 자신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까지 내던지면서 보호했던 신석호, 이병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행위였는지 소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더욱이 강 교수가 폄하했다고 해서 단재 사학이 사라질 수는 없다. 강 교수가 있기 전에도 단재사학은 있었고, 강 교수 이후에도 단재사학은 존재할 것이다. 더욱이 안 박사, 임 교수의 행동이 일부 국수주의적 색채를 띠었다고 해도 선열들의 피로 되찾은 나라의 역사를 다시 팔아먹는 식민사학들의 반민족행위와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환단고기』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수록 강단 식민사학계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몬 주요논리들은 대부분 근거 없음이 밝혀지고 있다. 1979년에 창작된 위서라는 것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고, 1911년에 창작되었다는 논리도, 『환단고기』의 핵심논리들이 조선시대 서적에서 이미 나타남으로써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우리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함께 계연수가 엮은 『환단고기』를 20세기 역사의 현장에서 나온 쌍벽의 사서(史書)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 두 책의 원형을 회복하여 바르게 재평가하여야 할 시점이 바로 오늘이다. 왜냐하면 식민사학자들의 반민족적 매국적 언동이 극해 달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하는 것인지 모르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전면적으로 대응해야할 준전시적 상황 아래서 도리어 일본과 중국의 편을 드는 식민사학자들의 자해(自害)행위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구한말과 비교하면 이완용, 송병준 일파의 편을 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식민사학의 편을 드는 일부 진보학계도 자신들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6인 투고자 중의 한 사람인 강진원 씨는 ‘역사비평’ 여름 호에 실린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에서 “한국 학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졌다. 그 선봉에 선 연구자들은 이기백·이용범·김용섭·이만열·조동걸 등이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 과연 그러한가?

이기백은 『한국사신론』(1999년판)의 서론에서 “현대의 한국사학은 일제 어용사가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하는 한편, 한국학자들 자신이 쌓아올린 근대사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성장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악조건 밑에서도 한국의 사학자들은 올바른 한국 사학을 키우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렇게 해서 성립된 여러 학파를 크게 정리한다면 민족주의 사학,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사학의 셋이라 할 수가 있다”(5쪽)고 역시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어느 학파인가에 대해 분명한 설명이 없이 식민사학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두루뭉수리한 어법으로 얼버무린다. 마치 본인은 식민주의 사학에 초연한 것처럼 유체이탈의 화법을 사용한다. 이 유체이탈의 화법은 자신의 추악상을 숨기고,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불통(不通)의 화법이다. 엉뚱하게도 서론 끝 부분에 “민족적인 입장에서 실증을 통하여 얻어진”이라는 문맥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본인은 ‘민족적 실증사학자’로 불리기를 원한 것 같다. 그러나 이기백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타파하였다는 스스로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작 식민사관을 타파한 근거를 찾을 길이 없다.

식민사관의  핵심은  ‘단군역사와 강역의 축소’, ‘위만조선의 고조선 계승설’과 ‘한사군의 한반도 내재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병도 이래 우리 민족사의 심장에 대못을 박은 것이 이 세 개의 독침인데, 이기백은 이를 얼마나 극복하였다는 말인가?  그의 생애 최종판(99년판)에서 기존의 대동강 중심설에 겨우 요하 유역일대를 고조선의 영역에 마지못해 추가로 포함시킨 것 외에 여전히 위만조선과 그 자리에 들어선 한사군은 대동강 유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기백은 고조선의 강대함을 영역으로 설명하지 않고 연(燕)의 말(고조선 사람은 교만하고 잔인하다는 말, 31쪽)로 비유하여 고조선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민족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또 한(漢)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치적 자유를 고조선인들은 누리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해, 일제의 식민정책을 은연중에 옹호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느 날 이병도는 이기백과의 대담(『역사가의 유향』)에서 “이 교수(이기백)와 김 교수(김철준)가 내 뒤를 이은 셈이지”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기백은 이병도가 말한 것과 같이 이병도의 고대사관, 즉 조선총독부의 고대사관을 철저하게 이었지 타파한 적이 없었다. 이기백도 신채호의 역사에 대해 ‘객관적인 타당성보다는 주관적인 신념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고 진보진영보다 앞서 비판함으로써 식민사학과 진보진영의 묘한 동거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 중에 군계일학처럼 나타난 학자가 김용섭 교수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반강제로 쫓겨난 김용섭  교수는 자서전인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2011년)에서 조선총독부의 스에마쓰가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를 들락거린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 바 있고, 김철준 교수로부터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김철준)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애”(770쪽)라는 비아냥도 들을 정도였다. 그는 신채호의 역사연구에 대해, “그(신채호)는 우리의 역사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거나를 가리지 아니하고, 최소한 우리나라를 주체로 하고, 우리의 역사사실을 충실히 서술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621쪽)고 말해 강만길, 이기백과는 다른 시각을 보였다.

또 한국사학의 과제에 대해, “왜곡된 사실의 부분적인 시정(是正)이, 한국사의 정당한 인식을 가능케 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한 위에서, 새로운 한국사관의 수립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대하는 자세, 문제를 설정하는 데서 가치관을 달리해야한다”(536~537쪽)고 피력했다. 뼈대는 그대로 두고 살점을 몇 군데 붙이고 떼어냈다고 해서 새로운 한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통렬한 지적이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사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채 쓰였기 때문에 한국사의 신론(新論)이 아니라,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의 답습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역사비평’ 여름 호에 실린 세편의 논문에 나타난 공통점은 고조선의 ‘넓은 영토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넓은 영토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선학(先學)이요,  안식처인 이기백으로부터 노골화 되었던 바 있다. 이기백은 1981년 국회 진술에서 “영토가 넓으면 위대하고, 영토가 좁으면 열등하다고 하는 식으로 국사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반도사관에 대한 철저한 신봉자가 그 반대의 사관을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오늘 식민사학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민족사학을 사이비니 유사니 하는 비학문적 어거지로 비판하는 원조를 보는 것 같다.

없었던 영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고대사료에 거듭 나타나는 고조선의 넓은 강역을 사료대로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일제 식민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인지 그 4차원적 논법에 찬탄을 금할 길이 없다. 박정학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철준도 1980년대 중반, 윤내현 교수의 기자조선 학술발표회장에서, “영토가 넓으면 다 좋은 것인 줄 아느냐? 젊은 사람이 예의도 없다”고 책상을 치며 윤교수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두 분 다 이병도의 철저한 후예답게 축소지향의 반도인이다. 

앞의 강진원씨도 “만주의 ‘고토’를 회복하지 않는 이상 한국은 강대국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 혹은 만주를 영유하고 있을 때가 전성기였다는 생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만주와 함께할 때 온전한 역사가 되고, 그때 강국이 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른 고구려를 높이 평가함과 아울러,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일체 의식이 파탄을 맞이하였다고 보며 반도의 역사를 저평가한 만선사 연구자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기백의 문장을 그대로 흉내 낸 것으로 행위는 객관적인 매국인데 평가는 애국으로 받고자 하는 이율배반에 다름 아니다.

마치 “너는 틀렸다. 나는 너와 다른 내 사관이 올바르다는 것을 이미 실증했고, 식민사학을 극복했다. 따라서 네가 그 틀린 생각을 자꾸 고집하는 것은 내가 이미 빠져나온 그 식민사학의 논리에 동조하는 꼴”이라는 이기백식 유체이탈 화법이다. 자기들이 아직도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속내를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듯  초연한 척, 상대방이 도리어 식민사학에 빠져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역설의 적반하장이다. 이종욱은 이들이 일제의 식민사학과 다른 면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식민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면에서 ‘후(後)식민사학’이라 혹평하고 있다. 이 후식민사학은 해방 이후 다시 등장하였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매국적 신(新)식민사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만주와 요서, 그리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조선의 넓은 영토와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일개 거수국(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윤내현 교수가 중국의 방대한 고대 사료를 가지고 사실로 입증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윤 교수의 고조선 대(大)강역설과 위만조선의 거수국설을 꺾을 강단사학계의 제대로 된 반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20여 년 동안 골방에서 벌벌 떨고 있다. 그러니 자신들은 무서워서 못 나오고 아직 학위도 따지 못한 어린 제자들을 싸움터로 내몬 것이 아닌가? 전장에서 졸병을 다 죽여 놓고도 ‘나 몰라’하는 못난 지휘관이 연상된다. 사관도 비열하니까 언행도 비열한 것 같다. 

윤 교수는 『고조선연구』(만권당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넓은 고조선 영토’(아래 ‘고조선의 후기 강역도’ 참조)에 대해 진실한 양심고백을 한다.

 
윤내현-고조선 후기 강역도(상권 371쪽)
“고조선을 바르게 복원하고 보면 만주지역에 있었던 나라들이 한국사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국가였고 고조선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읍루·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한(韓) 등은 모두가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었던 세력들이 독립하여 세운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시 필자가 한국사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대하기 위하여 그러한 의도에 맞추어 고조선을 재구성하였을 것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문연구는 진실 되어야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앞에서 한 말로써 대답을 대신하겠다. 그리고 만약 필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조선을 재구성했다면 그것은 역사왜곡으로서, 역사학자로서 큰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윤내현의 『고조선연구』 상권 20쪽)

차제에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과 같이 ‘축소지향의 단군역사’를 같이 펴고 있는 식민사학자들과 일부 진보학계에 민족의 이름으로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향후 20년 안에 그들의 모든 학설은 휴지조각으로도 쓰이지 못할 것이다. 이기백은 윤내현 교수를 비판하기위해 쓴 논문인  「고조선의 국가형성」에서 독백처럼,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고조선의 ‘실상(實像)이지 결코 그 허상(虛像)’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실상은 드러나고, 허상은 깨져야한다.

하지만 이기백은 윤내현 교수를 향해 고조선의 넓은 영토가 허상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실상일 뿐이다. 자신의 주장이 허상임을 자기 제자들이 알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이병도, 이기백의 ‘신식민사학’을 폐기하고, ‘윤내현사학’을 일으킬 때가 된 것이다.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의 결성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 외부 칼럼은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본보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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