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특별기고]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 문학평론가

대전 문단(文壇)의 원로 시인인 우봉(又峰) 임강빈(任剛彬) 선생이 지난 16일 오후 2시 향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충청도 선비, 충청도 문학계의 거장, 순수서정 시인 등으로 알려져 있다. 중·고등학교 학생 시절부터 무려 60여 년간 쉬지 않고 순수 서정시를 써 13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그의 대표 시로는 <동목(冬木)>, <벽(壁)>, <백목련>, <버들> 등이 있다. 황희순은 <동목(冬木)>을, 리헌석은 <백목련>과 <버들>을,『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는 <벽(壁)>을 대표시로 꼽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버들>을 임깅빈 시인의 대표 시로 추천하고 싶다.

꺾이지 마라 / 늘어진 가지야 / 전봉준의 / 혁명처럼 꺾이지 마라 / 춥고 어두운 겨울을 / 견딘 버들아 / 봄추위가 / 아직은 골목에 남아 있지만 / 맨 먼저 눈 뜨거라 / 춤 추거라 / 뿌리박은 나의 땅 / 늘어진 가지야 / 바람 따라 서러운 버들아 / 진정 꺾이지 않는 / 힘을 보여라  - <버들> 전문 

이 시는 간결하면서도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여 시의 특징인 단순성과 애매모호성을 잘 살렸다. 실패한 동학혁명을 소재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한 시인의 무의식 속에 연면하게 녹아있는 항일정신과 겨레사랑 정신을 잘 표출하고 있어 재야 민족사학자인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고(故) 임강빈 시인은 전통적 순수서정을 일관되게 노래했다. 그의 시엔 ‘나’란 자아가 빠져 있고, 무욕(無慾 : 비우고자 함이나 비운 상태)의 시심과 허정(虛靜 : 예술적 창조와 미적 관조의 바탕이 되는 순수의식)의 경지에 이르는 심재(心齋) 과정을 통해 내면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반도시적인 시골의 사물을 대상으로 쓴 시가 많다. 그의 시를 보면 사물이 곧 화자가 되고, 사물이 그림처럼 시각적으로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는가 하면, 한 폭의 정물화(靜物畵)처럼 그 기법이 섬세하고, 이미지가 극도로 압축되어 있다.

그는 해방 직후 공주시장에서 우연히『문장(文章)』이란 문학잡지를 보고 운문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의 시작(詩作) 계기다. 공주중 6학년 재학 시에 시집『해바라기』단권을 발간했는데, 혼란기에 분실했다. 1959년『중학생』이라는 잡지에 시가 게재된 적이 있다. 1950년 6월 1일 공주사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해 금당(錦塘) 이재복(李在福, 1918-1991) 교수와 물재(勿齋) 이원구(李元九) 교수 지도로 김구용(金丘庸), 정한모(鄭漢模), 장서언(張瑞彦, 교사), 김상억(金尙億, 교사), 최원규(崔元圭), 임성숙(林星淑) 등과 학내 문학 서클인 시회(詩會)를 창립하고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임강빈 시인은 정한모(鄭漢摸, 1923-1991), 박목월(朴木月, 1915-1978),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서정주(徐廷柱, 1915-2000) 등을 존경했고 그들이 쓴 시를 좋아했다. 그는 일평생 산문은 쓰지 않고 운문인 시만 썼다. 민중시, 참여시는 쓰지 않고 서정시만 창작했다.

문단활동으로는 1977년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장을 역임했고,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문단활동을 하면서 김구용(金丘庸, 1922-2001), 박용래(朴龍來, 1925-1980), 한성기(韓性祺, 1923-1984), 최원규(崔元圭), 나태주(羅泰柱) 등과 자주 어울려 술집을 전전하며 인생과 문학을 논했다.   

고인은 2016년 5월 10일 발간한 마지막 시집인『바람, 만지작거리다』서문에서 “무려 60년이나 시를 창작했지만, 널리 회자되는 시, 번번한 애송시 하나 없어 허무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박용래, 한성기 시인과는 달리 중앙문단에 기웃거리지 않고 충남과 대전의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김용재(金容材), 김영훈(金榮薰), 리헌석(李憲錫), 전영관(全榮寬, 1950-2016), 홍희표 (洪禧杓, 1946-2014) 등 훌륭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향토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우봉 임강빈 시인은 1931년 2월 22일(음력 12월 7일) 충남 공주군 반포면 봉암리의 풍천임씨(豊川任氏) 가문에서 부인 만당(晩堂) 임영순(任瑛淳)과 모 정순모(鄭順謨) 사이에 3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52년 청양중학교 교사로 교육계에 입문했다. 그 후 충남과 대전에서 44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96년 대전 용전중학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1956년『현대문학』에 <항아리>, <코스모스>, <새> 등의 시 작품이 추천돼 등단한 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여 시집『당신의 손』,『동목(冬木)』,『매듭을 풀며』,『등나무 아래에서』,『조금은 쓸쓸하고 싶다』,『버리는 날의 반복』, 『버들강아지』,『버리는 날의 향기』,『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한 다리로 서 있는 새』,『집 한 채』,『이삭줍기』,『바람, 만지작거리다』등 13권을 발간했다. 1966년 충청남도 문화상, 1989년 요산문학상, 1994년 공산교육상(예술부문), 1996년 대전시인상, 1998년 상화시인상, 2002년 정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임강빈 시인은 1954년 10월 25일 25세 때에 공주시 봉황동에 거주하는 23세의 이석희(李石姬, 85세)와 결혼해 슬하에 2남(창우, 창준) 1녀(창숙)를 두었다. 

고인의 영결식은 18일 오전 9시 대전문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대전공원묘원(세종시 장군면 금암리)이다.

필자는 지난 2016년 4월 28일 가수원 자택(은아아파트 103동 807호)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돌아와 생애와 업적을 정리했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소천하실 지는 미처 몰랐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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