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 박사의 계룡산이야기] <6>정감록으로 본 계룡산

계룡산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정감록(鄭鑑錄)이다. 정감록은 무엇인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은 쉽게 말해 참위설(讖緯說) 류의 민간비결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참위설이란 하늘과 땅의 조짐을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해석해 사회 현상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언하는 걸 말한다.

정감록에는 50여 종의 비결이 적혀있다. 대표적인 것이 감결(鑑訣),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器) 등이다. 대부분 지리쇠운설(地理衰運說, 땅의 기운이 약해진다는 설)을 기반으로 한국의 역대 왕조에 대한 운수를 추점(推占) 예언(豫言)하고 있다. 주로 ‘이씨 망(李氏亡) 정씨 흥(鄭氏興)’을 근본 비결로 하고 있다.

정감록 중 감결은 이씨조선의 조상인 이심(李 沁)과 그 대흥자(代興者)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鄭鑑)이 팔도 산맥의 운이(運移) 현상을 답사, 풍수적으로 토론한 것이다. 물론 가설(假說)이다. 정감록의 저작자·연대에 대해서는 조선 초의 정도전 설(說)과 조선 중엽에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지었다는 등 그 설이 분분하다. 대개 임진(壬辰)·병자(丙子) 양란 이후 민심이 흉흉해진 전란 혼란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런 원인으로 하나의 정감록이 아니라 내용이 다른 정감록 여러 편이 존재한다.

정감록에 수록된 계룡산 이야기는 많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정감록의 진수(眞髓)’라고 하는 감결(鑑訣)이다. 여기에서 계룡산은 이렇게 언급돼 있다.

"금강산으로 옮겨진 내맥의 운이 태백산·소백산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정씨가  팔백년 도읍할 땅이로다. 그 후 원맥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씨가 천년 도읍할 땅이며, 전주는 범씨가 육백년 도읍할 땅이요, 송악으로 말하면 왕씨가 다시 일어나는 땅인데 그 이하는 상세하지 않아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중략)

선비가 관을 삐딱하게 쓰고, 신인(神人)의 옷을 벗고 주변에 기(己)를 빗기고, 성인의 휘자에 팔(八)을 덧붙이면, 계룡산 돌이 희게 변하고, 청포의 대나무가 희어지며, 초포에 조수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움직이지 않으며, 혜성이 진성(軫性) 머리에서 나타나 은하 사이로 들어가 자미를 범하고, 두미(斗尾)로 옮겼다가 두성(斗星)에 이르러 남두(南斗)에서 멈추면 대중화 · 소중화가 한꺼번에 망할 것이다.(중략)

계룡산에 나라를 세우면 변씨 성을 가진 정승과 배씨 성을 가진 장수가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손발같이 일하게 되리라."

정감록의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器)’에는 계룡산 아래 신도안을 도읍지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계룡산 아래 도읍할 땅이 있으니 정씨가 나라를 세우리라. 그러나 복덕이 이씨에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밝은 임금과 의로운 임금이 연달아 나고 세상이 윤회하는 때를 당해 불교를 크게 일으킨다. 어진 재상·슬기로운 장수·불사·문인 등이 왕국에 많이 나서 일대의 예악을 찬란하게 장식하리니 드물게 보는 일일 것이다. 한 나라의 도읍으로는 금강이 제일이고, 다음이 송악, 그 다음이 한산이다. 서경(평양)·동경(경주)은 바다에 가깝고, 북경(원주)·원양은 땅이 몹시 좁으며, 마리산은 비록 바다 가운데 있지만 반드시 왕이 거하리라. 그러나 10년이 못되어 도읍을 옮길 것이다."

<도선비결(道詵秘訣)>은 도선이 남긴 비결 중에서 조선의 역사와 조선말에 나타난 징조와 정도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묘년을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솔의 발처럼 형세를 이룰 것이다. 오얏나무를 부추겨 주고 베고 나야 비로소 나라의 기틀이 정해진다. 한 나라가 편안해지니 누구의 공로인가? 오직 정도령이 총명하고 신기하며 예지롭기 때문이다. 군사를 서쪽 변방에서 일으키니 천자가 기쁘게 여긴다. 세 이웃이 서로 도와 계룡산에 세 아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도읍을 정하게 할 것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계룡산에 관한 이야기 중 앞서 살펴본 감결(鑑訣)의 ‘계룡백석(鷄龍白石) 청포죽백(淸浦竹白) 초포조생행주(草浦潮生行舟) 세상가지(世上可知)’란 내용이 있다. 이 말은 ‘계룡산의 바윗돌이 희어지고, 청포에 있는 대나무가 희어지고, 초포에 물길이 생겨 배가 다니게 되면 세상일을 알 수 있다’고 하여 계룡산에 정도령이 나온다는 뜻이다. 계룡산 바위들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검은색이었던 것이 지금은 흰색으로 바뀌었다. 산성비 때문인지 풍화작용에 의해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변한 것은 사실이다. 정감록이 아직까지 구전되고 읽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계룡산 주변 할아버지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는 계룡산의 바위가 검었는데 지금은 흰색이 됐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청포의 대나무는 아직까지 청포가 어디인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푸른 대나무가 하얗게 된다는 것은 대나무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포의 대나무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심하다는 것 밖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초포조생행주’는 새 도읍지가 되려면 금강물이 초포 앞으로 돌아들어서 배가 다녀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 있는 ‘무너미고개’가 터져서 강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초포는 논산시 광석면 항월리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을 일명 ‘풋개’라고도 한다. 이는 풀초(草)에 개포(浦)자를 써서 ‘초포’라 한다. 현재는 금강물이 대전 회덕을 지나 부강을 거쳐 공주-부여를 돌아 강경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런 금강 물줄기를 공주에서 부여로 돌지 않고 계룡산을 감싸 안고 논산을 거쳐서 직접 강경 쪽으로 빠지게 될 때 계룡산의 수태극(水太極) 형상이 더욱 뚜렷해진다. 다시 말해 풍수에서 말하는 계룡산의 ‘산태극 수태극’의 형상이 완전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계룡산 주변이 풍수지리적으로 더욱 좋아져 신도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참설은 계룡산 주변에 사시는 분들은 다 알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 희망이 현실화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참고로 류인학 씨(소설가)는 <우리명산답사기?를 통해 초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초포는 논산군 연산면과 노성면 사이에 있는 작은 시골인데, 옛날에는 마을 앞 냇가에 나룻배들이 드나들었다. 즉, 논산평야에서 나온 쌀을 실어내가고 해산물을 실어오던 배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토사가 밀려와 냇물이 얕아지는 바람에 배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 냇물이 지금은 다시 깊어 졌다. 금강하구언이 생겨 금강의 수위가 많이 높아졌기 때문인데 이제 작은 거룻배는 쉽게 오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전혀 동 떨어진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히려 금강하구언으로 인해 물길의 방해를 받아 금강의 수위는 물론 초포, 즉 논산천도 오히려 수위가 낮아진 것이다. 여기에다 농업혁명이라는 하우스에다 대형관정을 파고 수심 깊이 물을 빼내니 하천이 메마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필자는 고향의 연산천을 늘 바라보면서 그 옛날 젊었을 때 목까지 찼던 수심이 이젠 발목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인간이 만든 것이지 자연이 저절로 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난 계룡산연구가 이지만 정감록을 신봉하지 않는다. 다만 토정비결과 함께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언서로 여길 뿐이다. 그래서 정감록을 심도 있게 공부한 적도 없다. 그냥 이 책이 계룡산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하는 기본적인 소양만 알고 있을 뿐이다. 토정비결이 개인의 일을 예언했다면 정감록은 국가차원의 일을 예언한 점은 확실히 다르다. 정감록은 정씨의 성(姓)을 가진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 할 것을 예언했다.

정감록이 언제 기록되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이씨조선은 6백 년을 채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필자보고 정도령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라고 하면 ‘정(鄭)씨’ 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그냥 ‘정도(正道)령’으로 ‘바른 도(道)를 닦는 사람’정도로 여기고 싶다. 즉, 문화대국을 성취할 민족 사상으로 무장된 복과 지혜를 겸비한 출중한 인물이라 말 할고 싶을 뿐이다.

계룡산 신도안에는 정감록을 신봉하며 정도령 오기를 고대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정도령이 되기를 꿈꾸며 이곳에서 도인행세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흔적은 아직까지 신도안에 남아있는데 바로 ‘정감도사송덕비(鄭勘道士頌德碑’이다. 이 비(碑)에는 계룡산과 신도안, 그리고 정감록과 정도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아껴 둔 비밀을 뉘 능히 알리요 | 아! 도의 깨달음이여. 신의 기틀의 해석하노라 | 우주는 자주 변천하니 때와 장소에 따라 자주 변하도다 | 후천이 행한 수는 계룡시기에 미쳤도다 | 황극의 큰 운이 여기에 기초를 정하였도다 | 누가 관령(정도령)이라고 말하느냐 | 성스러운 조상과 손자이니라."

이씨 조선이 멸망한 지 1백 년이 흘렀다. 과연 계룡산의 새 시대는 열리는 것일까? 도대체 언제 그 시기가 오고 새 지도자 정도령은 누구일까? 그리고 우리는 정도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정감록의 기록처럼 계룡산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비스러움으로 가득했던 계룡산 아래 신도안은 대한민국 국군의 사령탑인 계룡대(鷄龍臺)로 변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 했다. 계룡산 가시권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행정도시인 세종시가 자리 잡고 서울에 있는 더 큰 정부기관의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방관련 최대 학교인 국방대학교가 계룡의 남쪽에 건물을 짓고 개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계룡산 인근은 마치 신(神)이 땅속에서 끌어당기듯이 탄탄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계룡산 시대가 현실화 되는 것인지 기대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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