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찬칼럼] 분수도 모르는 격(格) 타령

며칠 전 오랜만에 유성 재래시장을 찾았다. 예년에 없던 불볕더위를 이열치열로 달래볼까 작정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전통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장보러 나온 사람들의 열기에 묻혀 무더위가 한풀 꺾인 듯이 느껴졌다. 좌판에 펼쳐진 선지국밥, 순대, 파전을 보니 텁텁한 막걸리 한 잔이 목젖을 잡아당겼다. 시장 골목에서 쭉 들이키는 막걸리는 찌는 더위에 쏟아지는 한 차례 여우비 같은 시원함을 뱃속 깊이 불어 넣는다.

길목 한 모퉁이에서 양산 받침대에 기대어 오이, 가지 몇 개와 열무 서너 단을 놓고 오가는 눈빛만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었다. 마음이 동하여 구부러진 오이와 가지 등 댓 개를 집어 들고 집에 왔다. 백화점 채소들보다 모양이 좋지 않았으나 그 오이와 가지로 만든 냉국들은 참으로 맛있었다. 옛날 시골 맛이 배어 있고 가격 이상으로 제 값을 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의 격(格)을 갖고 있으니, 그 격에 맞아야 한다. 물건은 그 격을 가격으로 매기며 사람은 인격으로 표현한다. 인격을 품격이라고도 한다. 격이란 제 값을 하는 것, 그 직분과 위치에 맞는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기능과 역할이 그 환경이나 형편에 따라 다르다. 개인적인 아무개로서, 직업적인 아무개로서, 신분적인 아무개로서, 국민의 한 사람인 아무개로서 그때그때 그 직분과 역할이 다르다. 가정에서의 역할, 직장에서의 역할, 사회에서의 직분과 역할이 다르듯이 그에 맞는 격 또한 다르다. 중요한 것은 그에 부합하는 직분과 역할을 다한 경우에야 그의 격, 자격, 품격, 인격 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승하는 무더위와 나라 전체를 메말리는 가뭄처럼 국제정세는 열기를 더하고 국내경제는 가뭄에 시들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브렉시트, 트럼프, 일왕 조기퇴위 등에 따른 변화에 대한 대응과 세계정치 및 경제에 변화를 일으키며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대처방안 등을 고심해야 한다. 국내적으로 직면해 있는 서민경제의 침체, 청년실업률의 증가, 인구 감소, 급속한 노령화 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부실한 기업 혈세로 살리기, 억대 연봉을 누리는 대기업 고문들, 기업이익은 늘고 가정은 누진제 전기료 폭탄, 물 건너간 여야 합의를 통한 기한 내 추경 처리, 환갑 넘은 기사가 절반이 넘는 택시 등 최근 여러 매체에서 주요 기사로 다루는 내용들이다. 그냥 덥다.

무더운 여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할 뿐이다. 모든 것을 높으신 의원님들께 의탁하고 요구해서 미안하다. 선거 때마다 길거리에서 하는 배꼽인사를 받고도 국민으로서 감사하거나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단임제와 중임제, 대통령제와 내각제라는 권력구조 개편에만 전력을 다하고 더 많은 세수를 누려야 하는데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국민에 대한 봉사를 바라기보다 인허가권 등 규제권한을 갖는 상전의 대우를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두 달 만에 1000건이 넘는 의원 입법안을 쏟아내는 열정을 보이며 땀 흘리는데 더 많은 납세로 위로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알파고보다 분석적이고 미래 대응적인 두뇌로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밤낮을 경주하는데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국민의 대표로 뽑아놓고서 믿음을 저버린 것 같아서 미안할 뿐이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격려와 박수 대신에 국내·외 현안들로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 이 무더위에 편안한 외유로 푹 쉬게 해 주지 못해서 더욱 미안하다.

국민다운 국민으로서 국민의 격에 맞게 살아야겠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회보다 국회의원을 어려워하는 시민이 되려고 노력해야겠다. 선공후사(先公後私), 솔선수범(率先垂範)이 공직자가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무가 되도록 해야겠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조선시대의 관리로 착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나 혼자라도 노력해야겠다. 국가예산 때문에 노심초사하거나 여여가 얼굴을 붉히지 않게 군말 없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착한 시민이 되어야겠다. 높으신 분들의 명예와 신분에 누가 되지 않게 예의와 존경을 드리도록 매일매일 반성하는 착한 시민이 되어야겠다. 금수저도, 은수저도, 흙수저도 아닌, 그저 수저 없이 맨 손으로 태어났음을 억울해 하며 수저 타령 하지 말고 열심히 묵묵히 일만 해야겠다.

분수도 모르는 민초가 제격에 안 어울리는 격 타령을 해서 미안할 뿐이다. 이 더위에 지구 반대편에서 굽은 발, 뒤틀린 손, 흉터 생긴 얼굴, 울퉁불퉁한 손마디, 검에 찔려 피멍 든 허벅지를 숨긴 채 명예와 국위선양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금메달보다 더 환한 웃음을 안겨주는 진정한 복지국가를 꿈꿔서 더욱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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