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9>정향 조병호 선생과 계룡산

필자는 평생 동안 계룡산에 집착하면서 많은 계룡산 전문가(?)를 만날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계룡산도사’들을 찾아 계룡산과의 인연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계룡산에 오면 편안하고 포근하다고 말한다. 혹자는 접신(接神)이 다른 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목숨 걸다시피 계룡산에서 은거(隱居)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만난 많은 계룡산 은거자 중 상당수가 막연히 계룡산을 동경하고 있을 뿐 그이상은 아니었다. 왜 계룡산이 명산(名山)이고 영산(靈山)이냐고 물으면 별다른 대답을 하질 못한다. 필자가 만난 사람들 중 계룡산에 평생 동안 관심을 갖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준 두 분을 소개한다.

한 분은 한학자인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 1914~2005작고) 선생이다. 선생은 젊었을 때 계룡산 신도안에 들어오셔서 단군묘(檀君廟)를 창건하신 분인데 지난 620사업(계룡대 신도안이전)으로 대전 정림동으로 이주하셨다. 이주하면서 다른 보상은 필요 없고 신도안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대전으로 옮겨달라고 해서 실현시킨 분이다.

청양 출생으로,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께 배웠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정통을 이은 분으로 일컬어진다. 『처음처럼』으로 유명한 신영복(申榮福) 교수가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그를 가르친 붓글씨의 스승이다. 일찍이 1933년에 시서화사(詩書畵社)에 입문하고 1939년 조선서도전에 입선하자, 일본인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자, 이후 서예계와 인연을 멀리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고궁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국내보다 해외에서 알아주는 서예가이셨다. 전서(篆書)의 권위자로 특히 와전(瓦篆)에는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선생의 거주지인 정림동에 자주 들러 계룡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때마다 계룡산 관련 휘호(揮毫)를 써 주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 세 개만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 휘호는 선생이 전서(篆書)로 써준 ‘계산용수(鷄山龍水)’와 ‘계명용비(鷄鳴龍飛)’란 휘호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계산용수의 ‘계산(鷄山)’은 ‘능선의 꼴이 닭 볏처럼 생긴 계룡산(밝아오는 산으로 광명을 상징)’을 뜻하고 ‘용수(龍水)’는 ‘용이 조화를 부려 풍우(風雨)를 몰고 오는 것으로 금강(錦江)’을 상징하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계룡산은 풍수에서 말하는 산과 강이 만나는 대길지(大吉地)라는 것으로 풀이하신 것이다.

‘계명용비(鷄鳴龍飛)’의 ‘계명(鷄鳴)’은 ‘닭이 운다는 뜻으로 새벽을 알리는 신호’를 말하고, ‘용비(龍飛)’란 ‘용이 하늘을 날아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이치이니 이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신성한 곳’이라고 역시 풀이하셨다. 평생 한학을 공부하신 학자로서 계룡산에 대한 혜안(慧眼)을 내다보고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정향 선생과 필자는 계룡산과 관련해 여러 번 인연을 맺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96년 9월 12일 필자의 ‘계룡산 출판기념회’이다. 선생은 필자가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친히 ‘계룡산 휘호’를 써가지고 참석하셨다. 더구나 표구까지 해서 행사장에서 전달하신 것이다.

당시 필자는 신문사 기자였음에도 그 인연을 소중히 하지 않고 태만하였다. 아마 한문(漢文)에 까막눈(?)이어서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필자를 무척 아끼셨다. 젊은 기자가 계룡산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대견스러워 하셨다. 필자가 정림동을 찾을 때마다 그냥 보내지 않고 다양한 글씨를 써주셨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이런 소문이 나자, 정향선생의 글씨를 받고 싶은 분들이 필자를 찾아오는 소동(?)도 벌어졌다. 당시 필자와 함께 가면 무조건 글씨를 써줄 정도였다. 글씨 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용(龍)’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어찌나 해박하신지 한 시간이나 줄줄 설명해 주셔서 ‘얼마나 공부하셨으면’하고 부러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당시 필자는 진지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시간을 보낸 그 시절이 너무나 아쉽다. 계룡산 공부를 제대로 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가끔 정림동에 가면 정향선생의 향취가 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곤 한다. 선생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것은 계룡산공부에 더욱 더 매진하는 것뿐이다. 필자가 지금도 매일 이렇게 계룡산에 집착하는 것도 정향선생의 뜻에 조금이라도 부응하기 위해서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또 한 분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평생 동안 대학에서 강의한 조동길 전 공주대 교수(국문학)이다. 조 교수는 공주(公州)와 계룡산에 대한 무한한 정(情)을 가지고 많은 작품 활동을 해왔다. 『쥐뿔』, 『달걀로 바위 깨기』 등 인기소설을 쓰셨으며, 계룡산관련 글로는 ‘초혼단(招魂壇)에서 숙모전(肅慕殿)까지’, ‘계룡산과 갑사 다시보기’, ‘1920년대의 계룡산’, ‘文學에 나타난 계룡산’ 등이 있다. 특히 그는 ‘계룡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장문으로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계룡산은 공주의 표상(表象)이자 충남의 상징(象徵)이요, 대한민국의 어머니의 산이다. 때로는 국립공원의 관광지(觀光地)로, 때로는 말세(末世)의 메시아 강림지(降臨地)로, 때로는 민족종교(民族宗敎)의 본산지(本山地)로, 때로는 국방의 핵심요처(核心要處)로, 때로는 한(寒)·난(暖)대의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때로는 불교의 성지(聖地)로, 때로는 관군에게 쫒기는 사람들의 피난처(避難處)로, 때로는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은거지(隱居地)로, 때로는 신령한 영험(靈驗)을 내려주는 무속인의 기도처(祈禱處)로, 때로는 시인묵객들의 풍월(風月)의 대상으로, 때로는 험난한 세상 살기 힘들어 가족을 이끌고 들어온 화전민들의 생존처(生存處)로, 때로는 심신이 지친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休息處)로, 그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 천 년 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 산을 찾아 기대고 의지하고, 빌고 기다리며, 한을 삭이고, 희망을 담금질하고, 현세의 고난(苦難)을 극복했던 그런 산이다.

이런 산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혜택 중의 하나다. 산 가운데는 명산(名山)도 있고 험산(險山)도 있고, 악산(惡山)도 있고, 성산(聖山)도 있는데, 그 가운데 계룡산은 가히 성산(聖山)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그 위치가 한반도의 중앙에 있어 그 형상(形象)으로 보면(토끼로 보든, 호랑이로 보든, 아니면 사람으로 보든) 계룡산은 허리와 배, 그 가운데서도 배꼽쯤에 해당한다. 배꼽이란 무엇인가.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生命)을 유지하던 탯줄이 아닌가. 그렇게 보면 계룡산은 이 한반도의 생명의 원천(源泉)이요, 우리 민족의 모든 힘을 발휘(發揮)하는 근원(根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산은 우리 겨레의 어머니 산이요, 우리 민족의 영원(永遠)한 고향(故鄕)과도 같은 산이다.

계룡산의 모든 부문을 간략하게 요약(要約)했지만 이 산이 갖고 있는 특징적 요소는 거의 다 들어갔다고 봐도 과언(誇言)이 아니다. 윗글에는 계룡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상(思想)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도 계룡산에 대한 조동길 교수의 개념(槪念)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계룡산이 다른 산과 비교할 수 없는 성산(聖山)이라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계룡산은 이런 특징적 요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계룡산은 ‘산자수명(山紫水明)’과 ‘청한양명(淸閑陽明)’의 명승지로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꼭 찾고 싶었던 산이기도 했다. ‘산자수명’을 그냥 풀이하면 ‘산 빛이 곱고 물이 맑다’는 뜻이지만, 속뜻은 ‘산수의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움’을 말하며, ‘청한양명’은 ‘맑고 한가하며 환하게 밝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는 충청인의 기질인 ‘청풍명월(淸風明月)’과 같은 뜻이라고 하겠다.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鄭道傳)이 각 지역 사람들의 품성(品性)을 평가하여 작성한 것으로 ‘사자품평(四字品評)’의 내용은 이렇다. 경기도(京畿道)는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에 비친 미인), 충청도(忠淸道)는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전라도(全羅道)는 풍전세류(風前細柳,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경상도(慶尙道)는 송죽대절(松竹大節, 소나무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 강원도(江原道)는 암하노불(岩下老佛, 바위 아래 있는 늙은 부처), 황해도(黃海道)는 춘파투석(春波投石, 봄 물결에 던지는 돌), 평안도(平安道)는 산림맹호(山林猛虎, 산 속에 사는 사나운 호랑이), 함경도(咸慶道)는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탕에서 싸우는 강인한 개) 등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과 청한양명(淸閑陽明), 그리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표현으로 이에 대한 조선(朝鮮)시대 선비들의 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성혼(成渾, 1535~1598)이 지은 청풍명월을 주제로 한 시조(時調)를 하나 소개한다.

말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없는 유수(流水)로다
값없는 청풍(淸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말없이 청산(靑山), 정해진 모양 없는 유수(流水), 값으로 나타낼 수 없는 맑은 바람, 세상사람 모두가 주인인 밝은 달, 그 속에 사는 주인공 등 이 모든 것은 자연에 순응(順應)하며 늙어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충청의 정신인 ‘청풍명월’이 다름 아닌 계룡산 주변의 산세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럼 계룡산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어떤 형상(形象)을 하고 있으며 계룡산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계룡산하면 보통 두 가지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배달민족의 영산(靈山)’ 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충청인의 안식처(安息處)’ 라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한반도 최고의 명산(名山)이라는 개념이, 후자(後者)는 충청도의 대표적인 산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다.

여기에다 계룡산하면 일반 다른 산과는 달리 영험(靈驗)하고 오묘(奧妙)한 산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계룡산에 대한 이러한 상징은 오래전부터 일컬어져 왔다. 이 산이 신라 때는 ‘오악(五嶽)’의 하나로, 조선 때는 ‘삼악(三嶽)’ 중의 하나로 국가 제사처로 위상(位相)을 가졌던 사실을 상기하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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