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찬의 꿈과 희망이야기] 한밭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객원 논설위원

참으로 희한한 날씨다. 아침엔 날씨도 기분도 상쾌해야 한다. 봄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가을은 계절의 황제다. 가을엔 모든 사람들이 황금빛 결실로 충만하고 마음은 삽상해야 한다. 우중충한 날씨로 심상해서는 안 된다. 을씨년스런 기분으로 뭐 씹은 기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운동하지 못한 근육에 지방이 쌓여 찌뿌듯한 노화가 때문일지 싶다. 아침마다 기쁜 마음을 갖는 정신 수양이 부족한 탓일 게다. 만성이 된 일상에 뭔가 참신한 목표에 도전하지 못하는 게으름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되돌아보면 꼭 그런 이유들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매일이 개운하지 못 하고 뭔가 찜찜하고 거북스런 이상한 가을이다. 

민병찬 한밭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객원 논설위원
장마를 피하여 짬을 낸 휴가와 맞닥뜨리는 즐거움이 있어야 피서도 추억이 된다. 남들도 피서를 즐기는 북새통 속에 고생도 좀 따르는 더위 도피가 푹신한 휴가가 될 수 있다. 올여름엔 유래 없던 폭서로 전 국민들의 가슴을 태웠다. 모두가 태우는 마음을 뒤집고 피서로 한가할 수 있는 내 용기가 그 폭서에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달콤한 찰옥수수 한 자루나 시원한 수박 한 조각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던 잔혹한 여름이었다. 모내기 한 논바닥이 가뭄에 갈라지자 소방차로 물을 뿌리던 어느 봄날이 부럽게 느껴지던 여름이었다.

하늘이 잔인한 여름이었다. 부유하지 못해 해변 가의 고급 아파트에 살지 못해서 태풍에 물난리를 당하지 않은 내가 다행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던 여름이었다. 45℃의 열지수에 내 마음의 체감온도는 증기점으로 끓던 여름이었다. 매미 울음 시원하던 원두막이 이제는 더 이상 옛 여름의 추억이 아닌 무능한 서민의 숙명으로 생각되던 여름이었다. 재난 경보가 울려 깜짝 놀라 깨어나 보면 아침 안개 조심하라고, 고장 나서 똑똑하지 못한 내 스마트폰에 짜증나는 여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폭서의 여름을 사막의 여름으로 나를 내몰아 열사병에 탈진시킨 여름이었다.

병역의무를 용감하게 치른 이나 운 좋게 열외라는 포상 받은 이 할 것 없이 빵모자 쓴 웅장한 건물 안에서 뛰어난 각개전투 실력을 뽐내던 막바지 여름이었다. 기발한 발상과 교묘한 전략으로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그들의 노력에 눈 감고도 이해하는 봉사된 마음으로 감사해야 하는 여름이었다. 잠 못 이루는 밤, 제갈공명의 신기를 읽는 듯 신판 삼국지에 매료되어 잠 못 이루던 여름이었다.

이전투구라는 말은 하찮은 서민들 속에서나 찾을 수 있지, 고매한 금배지 번쩍이는 금 수저 속에서는 신조어라고 새삼 일깨우던 여름이었다. 제갈공명의 신귀에 홀려 혼비백산 옴짝달싹 못하는 위나라 병졸들 같이 매일의 기분이 소멸된다. 저공이 원숭이에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준다던 도토리를, 네 개, 세 개로 슬며시 바뀌어 받는 기분이다. 좋은 것이든 상한 것이든 도토리 개수도 따지지 말고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된다는 기분이 든다. 공약으로 네 개를 주었으니 받는 것은 재주껏 요령껏 받아먹으면 된다. 그렇게 태풍처럼 지나간 여름이었다.

계절이 바뀌면 사람의 환경도 바뀌고 기분도 전환되는 것이 인생사다. 그래서 기다렸던 가을이다. 이때쯤이면 의례히 새로움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또 다른 계절의 문턱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지축이 흔들리는 변화가 일어나 찌뿌둥한 기분을 아예 송두리째 뽑아 놓았다. 계절의 흐름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음이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자연의 이치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까지 인류의 현실이다.

그래서 전국을 흔드는 지진이 발생해도 나는 가만히 앉아서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건물 벽이 쩍 갈라지듯 내 가슴이 금이 가고 찢어지는 아픔이 있어도 기다리면 된다. 기왓장이 깨어지고 지붕이 허물어져 내리듯 내 몸이 허물어지고 마음이 깨어져도 참아 내야 한다. 손등이 상처 아물 듯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나를 놀리는 듯, 햇볕이 눈에 띄는 가을날이 오는가 싶더니 멀건 대낮에 천둥이 울렸다. 천둥에 놀란 내 가슴에는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배움과 전달만 생각하던 내 대뇌는 정전으로 깜깜해졌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어미 말에 망아지까지 뛰어들어 내 가슴을 짓밟아 놓았다. 꼬박꼬박 세금 낸 죄밖에 없었는데, 내 마음은 왜 처참하게 부서져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을이다.

세금이 너무 많아서 그 망아지는 바다를 건너서 헤집고 뛰어다녔다. 관우가 탄 적토마가 삼국을 짓밟고 다니듯, 미세 먼지 속에 가린 장막을 덮고 망아지는 뛰어 놀았다. 기회를 틈타 파고드는 싸늘한 가을 날씨마저 쓰린 가슴을 도려내며 고통을 더하는 가을이다. 그렇게 가을의 한가운데, 시월의 마지막은 또 찝찝하기만 했다.

벌써 치매 끼를 보이는 모양이다. 벼르고 벼르던 주말 산행을 깜빡 지나쳤다. 모처럼 가을 같은 햇살이 거실 한가득 소란을 떨던 호기였는데 넋 잃은 낮잠에 빠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마음 한 번 다잡고 가까운 야산이라도 올라가 소리를 터뜨려 응어리를 뱉고 싶다. 내일인가 싶어 날을 잡으면 꼭두식전부터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하늘에 대고 투덜대니 또 찜찜한 가을 하루가 시작된다. 주간 날씨를 예의주시하고 이번 주말이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오보된 일기예보가 값비싼 전자 장비의 티를 내며 짙은 안개와 미세 먼지를 뿜어낸다.

기분 전환을 위해 만사를 떨치고 들판에라도 달려가 막힌 가슴을 뚫고 싶다. 한없는 울부짖음으로 답답한 가슴을 토해 내고 싶다. 망망대해로 뛰어들어 성난 파도에 부딪혀 온 몸이 부서지고 싶다. 아니다 싶어, 가을비를 마다하고 용감히 도전한 짧은 산행에서 몸살을 앓게 되었다.

해마다 한 번쯤은 앓고 나는 몸살이려니, 며칠만 참아 내면 나아지겠지. 무언가 찝찝하고 이상야릇한 내 기분도 언젠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잊고 말겠지. 세월이 약이겠지. 이제까지 그렇게 지내 왔고, 앞으로도 또 그렇게 지내야만 할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서 슬며시 알게 모르게 스멀거리는 그 무엇인가는 무엇일까?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의 막바지에, 또 다른 몸살이 겹치지 않을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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