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박사의 그림으로 만나는 천년 의학여행] <13>
갈레노스의 해부학적 착오들은 1543년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수많은 인체해부를 통하여 수정했지만, 그의 심장과 순환 등에 관한 생리학적 오류들은 1628년 윌리엄 하비가 새로운 혈액순환의 원리를 제기하고 나서야 극복될 수 있었다.
130년 그리스 태생인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의 주치의사로서 온갖 종류의 부상을 접하며 실전수술의 경험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강연과 공개토론, 저술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의가 됐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는 인체해부가 금지되어 있어 동물해부를 토대로 했던 그의 해부학에는 인체에서와 다른 실수와 착오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장에 심실이 2개이며 그사이 벽의 작은 구멍들을 통해 혈액이 셀 수 없이 오가고, 뇌는 커다란 점액질 덩어리이며 거기에서 정신적 영기(英氣)가 배출되면서 신경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등 오류가 많았다.
이후 몇 세기 동안 갈레노스의 이론들은 워낙 확고하여 그와 반대되는 견해라면 무엇이든 이단으로 취급되었을 만큼 신성시 되었다. 갈레노스의 이론만이 절대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심각하게 저해되었고 1500년이 지난 후 자유로운 사유(思惟)가 가능해져 그의 많은 해부학적 오류가 밝혀지자 그의 역사적 역할은 사장되었다.
또 레이텐 대학의 해부 극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직접 해부하며 인간의 장기를 보여주는 공개적인 해부 실연방식도 도입했다. 1537년 베살리우스는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임명됐다. 부단하게 해부를 반복한 끝에 그간의 갈레노스의 해부이론을 뒤엎는 허점들을 찿아냈다.
그는 그의 나이 28세에 ‘인체구조에 관한 7가지 책(약칭 파브리카)’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인간의 근육을 묘사한 170쪽의 그림과 여러 삽화가 포함돼 있어 이후 해부학 연구의 상징이 되었다.
예술도 인체의 구조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예술가들은 15세기 외형만을 중시하던 고딕양식을 거부하고 인물을 실제와 똑같이 표현했다. 인체를 최초로 상세히 묘사한 화가들 중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한 수도원의 내부 장식을 의뢰 받았을 때 보수의 일부로 성당병원에서 인체를 해부할 권리를 달라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다빈치의 관찰력과 정밀함을 보여주는 일례는 윈저 성의 기록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종아리의 정맥그림으로, 외과의사들이 이 정맥의 역할을 이해하기까지 이후 450년이 흘렀다고 한다. 그는 의학에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화법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섬세하고 치밀하여, 현대 과학삽화의 토대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