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117>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각종 '게이트'들이 있었지만 이번 최순실 게이트만큼 10대부터 노년까지 온 국민을 분노케 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전국적으로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는 가운데 대전에서도 지난 1일부터 둔산동에서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대학생 뿐 아니라 교복 입은 중·고생이 적지 않은데 이들이 단순한 재미로 시위현장에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른에게는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이 최대 관심사지만 대학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는 그녀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특혜가 더 큰 상처다. "돈도 실력이니 너희 부모를 원망하라"는 정유라의 SNS 글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주었다. 누구는 말 한마디로 대통령까지 쥐락펴락하며 출석을 안 해도, 과제를 안 내도 학점을 받을 때 다른 누군가는 돈 없고 '빽'없는 부모를 원망해야 하니 말이다.

임연희 교육문화부장
"돈도 실력이니 너희 부모를 원망하라"

충북의 한 여고생들이 썼다는 "돈도 실력인 세상에서 돈도 실력도 없는 우리는 그저 수긍하며 공부만 하는 것이 정답입니까? 정유라만을 위한 세상에 우리들의 금메달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대자보에는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제2, 제3의 정유라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자괴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직 세상으로 나가지도 않은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부터 준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

중·고생들이 대통령 퇴진 대자보를 붙이고 시위현장까지 나오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세월호 세대이기 때문이다. 현재 고3 학생들은 갓 고등학생이 된 2014년 선배 언니오빠 250명이 차가운 바다로 수장되는 비극을 지켜보았다. 이 사건 후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돼 대규모 수학여행도, 체험학습도 금지됐으며 아이들에게 제주도 수학여행은 곧 세월호 참사라는 슬픈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이런 아이들이 정부가 세월호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참사 당시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와 어른들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불신이 가득한데 이들에게 좋은 국가와 민주주의, 자유가 와 닿기나 하겠는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증거와 의혹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이토록 허망한데 아이들에게 어떻게 민주주의를 말해야 할지 답답하다.

현장에서 만난 중·고교 교사들은 이번 최순실 사태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정치뉴스를 읽게 됐다고 했다. 뉴스라고는 연예·스포츠 기사만 보던 아이들까지도 최순실, 최태민, 정유라, 박근혜, 시국선언 등을 검색한 뒤 수업시간에 시국선언이 무엇인지, 검찰 수사를 믿을 수 있는지,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정말인지를 질문 한단다. 대통령과 정부, 정치권, 언론은 아이들이 품는 합리적 의심에 진실로 답해야할 의무가 있다.

전국적으로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는 가운데 대전에서도 지난 1일부터 둔산동에서
대통령부터 진실 밝힘으로써 민주주의 살아 있다는 것 보여줘야

그런데 대전에서는 최순실 국정농단 시국집회에 참가한 중·고생들에 대한 사찰 논란이 일고 있으니 한심하다. 교육청 직원들이 교복 입은 학생들의 해당학교에 통보했다는 것인데 전교조와 인권단체는 사찰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아이들이 붙인 대자보를 떼는가 하면 교사들에게 수업시간에 시국관련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교장도 있다고 한다. 시위에 나온 아이들의 학교와 이름을 적어 통제 관리하는 게 능사가 아니며 학생들의 자발적 의사표현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맞지 않다. 진실은 숨기고 덮을수록 의혹만 키울 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하자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고 비판했었다. 차가운 겨울날 어린 학생들이 “잃어버린 꿈을 돌려 달라”며 촛불을 들게 만든 박 대통령이야말로 참으로 나쁜 대통령이다. 돈과 권력이 실력인 세상을 만들어 놓고 어린 학생들에게 꿈을 향해 열심히 공부나 하라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고 부끄럽다.

역사 속 항쟁에서 보았듯 성난 민심은 그리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내가 살아갈 미래의 희망이 사라지고 우리 아이가 나갈 세상에 꿈이 무너진 실상을 본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진실밖에 없다. 대통령이 세월호보다 정유라를 선택했다고 믿는 젊은이들에게 어쭙잖은 해명은 통하지 않는다. 대통령부터 나서 진실을 밝힘으로써 그래도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무서운 건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10대들의 원망 가득한 눈망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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