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6> 청와대의 세종시 이전 당위성(3)

필자는 지난 두 번에 걸쳐 청와대를 옮겨야 하고 그 위치는 계룡산하(鷄龍山下)가 제일 좋다는  논지(論旨)를 표명한 바 있다. 이는 다른 산과 달리 계룡산은 뿌리를 잊지 않고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 명산이라는 이유도 밝혔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앞으로 다가올 이 산의 신령(神靈)한 기운(氣運)을 받는다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윤리도덕이 세계만방의 종주국(宗主國)이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계룡산에 대운(大運)이 오면 훌륭한 도덕정치가 실행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부형태는 어떤 것으로 하여야 하는가. 지금까지 실시한 대통령제를 계속 고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각책임제 등 다른 정부 형태를 고민해야 하는가? 작금의 정치현안으로 대두된 헌법 개정과 맞물려 지지하게 검토해보자 한다. 

계룡산 신도안은 언젠가는 ‘나라의 수도(首都)’가 된다고 하였다. 그럼 언제 국도(國都)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계룡산 신도안에 수도가 들어선다면 지금의 어떤 자리에 어떤 기관이 들어서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룰 수 있을까?

정감록의 ‘계룡백석(鷄龍白石), 청포죽백(淸浦竹白), 초포조생행주(草浦潮生行舟), 세사가지(世事可知)’라는 말이 해답이다. 이 말은 ‘계룡산의 바윗돌이 희어지고, 청포에 대나무가 희어지고, 초포에 물길이 나서 배가 다니게 되면 세상일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정도령이 나온다는 뜻이다. 즉, 계룡산에서 ‘정도령이 나오면 이곳이 국도가 된다는 뜻’과도 일치한다.

정도령 하면 성(性)이 정씨가 아니라, ‘바를 정(正)의 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갖춘 인물이 나와서 정치를 할 때 도덕정치가 실현되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한번 돌이켜보자. 계룡산 바위는 내가 어렸을 때는 전부 다 검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늘 나한테 한 이야기가 있다. 계룡산의 돌이 지금은 검지만 언젠가는 하얗게 될 거라고. 그때까지 살고자 한 것이 할아버지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바위의 색이 점점 변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하얗게 되어 버렸다. 밀목재(신도안에서 동학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관암봉(冠岩峯) 쪽으로 가보면 알 수 있다. 바로 계룡산에 운(運)이 왔다는 증거다.

청포의 대나무는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초포는 물길이 나지 않아 배가 뜨지 못하고 있지만 현재는 금강물이 이 지역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초포에 물길이 났다는 것도 어느 정도 됐다고 볼 수 있다.

신도안은 조선 초인 1393년 일 년여에 걸쳐 도읍역사(都邑歷史)가 이뤄졌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 ‘태조가 즉위하여 계룡산 남쪽에 도읍을 옮기려 기초공사까지 하다가 물길이 멀어 중지하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도 신도안 여러 곳에 주춧돌이 남아 있고, 신도안이라는 지명에 신도(新都)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사대문(四大門)은 물론 지금의 서울의 지명인 종로터·대궐터·팥거리 등 그 당시 천도공사와 관련한 역사적 지명, 자료들이 즐비하다. 필자는 계룡산 주변 신도안이 또다시 왕도로 거론된다면 어떤 정부형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아래처럼 내리고자 한다.

내각책임제, 부정부패 없는 청렴결백한 공직상

계룡산의 형세를 자세히 관찰해보자. 계룡산은 일자봉(一字峯) 중심에서 동으로 한 가닥이 힘차게 내려와 마안봉(馬鞍峯, 일명 장군봉)을 일으키고 이 주맥이 내려와 마체(馬體)를 이루고 이 마체에서 중심맥이 내려와 동대궐터를 형성했다. 이는 마화위룡격(馬化爲龍格)이라 할 수 있다. 신털이봉이 주체(主體)를 이루고 있다하여 예전에는 ‘동대궐터’라 하였으나 필자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마안봉이 형기상으로는 ‘재상필(宰相筆)’이라 할 수 있으나 왕기(王氣)가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이기상(理氣上)으로 보더라도 내맥(內脈)이 왕기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자리에는 암용추·수용추·북문다리 등이 모여 국(局)을 이루었으므로 삼권(三權)이 이곳에 모여서 입헌민주주의(立憲民主主義)인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가 들어서면 좋다. 그러나 이곳 역시 청빈한 거수국(去水局)으로 되어 있다. 청빈한 거수국이 되면 물질보다 정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행정부가 들어오면 부정부패가 없는 청렴결백한 공직상(公職相)이 이뤄진다고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만 이 자리의 결점은 북문이 낮아지고 삼불봉이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삼불봉은 일자봉 중심에서 작은 가닥이 동으로 내려와 멀리 뻗어가지 않고 순전한 석산(石山)으로 동학사 북편에 험준한 자세로 높이 솟아 있다. 귀인이 있는 곳에는 운검(雲劍, 의장에 쓰이던 큰 칼)이 서 있고 창검을 가진 경호원도 필요하지만 이것은 험사(險砂)이므로 혈처(穴處)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은데 보이게 되어 ‘옥(玉)의 티’라고 하겠다.

계룡산은 다른 산과 같이 중중첩첩 이뤄진 산이 아니고 특이한 봉(峰)만이 한 일자로 높이 솟아 평지돌출이나 다름없는 독립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므로 지맥이 멀리 뻗어가 다른 큰 산을 이룬 것이 없고 다만 이 지맥들이 겹겹이 주산(主山)을 옹호하며 큰 형세를 이루고 있다.

이 지맥들을 살펴보면 연천봉에서 한 맥이 서쪽으로 떨어져 내려가서 잔산야록(殘山野麓, 낮고 작은 산들)을 이뤄 공주를 지나 부여에서 끝을 맺었으며 또 한 가닥은 마안봉에서 북문다리를 거쳐 동월을 지나 남으로 내려가 위왕산에 이르러 지현굴곡(之玄屈曲)으로 내수구(內水口)를 장식하였다. ‘수구’라 함은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말하는데 국가에서 보면 경제를 지출하는 창구인데 다행히 이 위왕산 수구는 물굽이가 선(線)이 분명함을 볼 때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부정 없는 지출이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수구 중심에 ‘화표사(華表砂)’가 특립(特立)하고 있다. 화표사는 ‘부정을 적발해 게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풍수지리 용어로 쓰인다. 따라서 화표사가 있으면 부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인데 위왕산 수구가 이렇고 보니 청렴결백한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이 된다고 보면 된다. 또 동월계곡에서 한 가닥이 동남으로 내려가 구봉산이 중간수구를 만들고 다른 가지는 왕가봉(王駕峰)을 지나 금병산(金屛山)이 외청룡이 되어 신탄진(薪炭津)에서 내려오는 물을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성에게서 적당한 세금 거둬 정부 운영

무엇에 근거하여 이 자리가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물은 재물(財物)이라고 볼 때 이 자리가 외부에서 조공(朝貢)해 들어오는 물은 없고 본 바닥에서 흐르는 물 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경제구조란 백성에게서 적당한 세금을 거둬 정부를 운영할 뿐 모든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아 한 곳에 축적(蓄積)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정부가 앞으로 들어선다는 증거(證據)이기도 한다.

계룡산 주변의 물은 계곡의 여러 고을을 거쳐 천만 갈래 흐르는 물이 합하여 금강을 형성하여 신탄진을 거쳐 북록(北麓, 산의 북쪽)에 이르렀고, 연기(燕岐)방면에서 달려온 산과 계룡산 후록(後麓) 명덕봉에서 내려온 맥이 서로 만나 십리협곡(十里峽谷)을 이뤘다.

이후 수백리를 북으로 올라온 산과 수백여리를 둘러 서북으로 모여온 물이 이곳 북록에서 서로 만나 장엄하고도 멋진 도수구(都水口)를 만들었다. 이곳이 바로 창벽강(蒼壁江)이다. 수천만 가닥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룬 것은 수천만 민중의 개인 개인의 재물이 모여서 부강한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과 같다.

국태민안 태평성대

그러므로 이 산과 물은 분명히 독재군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입헌민주주의 국가를 확립한다고 믿으면 된다. 특이한 것은 수많은 물들이 모여 계룡산 정면을 향하여 조공(朝貢)하는 것이 아니고 배후에 모여서 수구(水口)를 이룬 것인데 이는 모든 백성의 재력이 배후에 모여서 정부를 밀어주고 도와주는 격(格)이다. 이는 계룡산이 분명히 민중의 힘이 모여서 민주주의 국가를 확립한다고 믿을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산과 물의 구조를 볼 때 민주주의 극치를 이뤄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룬다고 보면 된다. 나는 곧 계룡산의 운(運)이 도래해 바로 남북통일이 이뤄져 참다운 민주주의 꽃을 피우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의 독자적인 견해에 불과하니 현명한 판단은 강호제현(江湖諸賢)에게 맡길 수밖에.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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