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박사의 그림으로 만나는 천년 의학여행] <17> 세균과 소독법의 발견

이승구 선병원재단 국제의료원장 겸 정형외과 과장.

세균학은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1882-1895)에 의해 시작됐다. 소르본과 릴 대학에서 화학교수로 재직할 때다.

그는 제빵의 발효가 균류에 의해 이뤄지며, 미생물들이 반죽된 빵에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세균학의 태동이다.

파스퇴르는 오늘날 낙농업에서 제일 중요한 저온 살균법에 이어 탄저균과 당시 불치병으로 여겼던 광견병 예방 백신을 발명했다.

그는 좌우명이 “나는 일이 필요하다”였을 정도로 모든 일에 열중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를 기념해 파스퇴르연구소를 세웠고 사망 후 그곳에 묻혔다.

국민투표에서 루이 파스퇴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파스퇴르 이후 세균학의 발전을 이끈 사람은 독일 베를린의 로베르트 코흐(1843-1910)다.

그는 보다 실제적으로 위생학과 세균학의 연구에 몰두, 상처감염의 기원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통해 병실 내 공기 감염, 환자 대 환자 및 환자 대 보호자간의 감염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결핵과 콜레라를 일으키는 간상균(bacillus)을 발견하고 당시 만연하던 투베르쿨린 진단약을 개발했다. 그 공로로 1905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알베르 칼메트(1863-1933)와 카미유 게랭(1872-1961)은 BCG결핵 예방백신을 만들었다.

이후 세균학은 발전을 거듭한다. 노르웨이의 아르메우에르 한센(1841-1912)은 나병균을, 독일의 알베르트 나이서(1855-1912)가 임질균을, 덴마크의 크누드 파베르(1862-1955)가 파상풍균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기초면역학이 크게 발달했고 질병 치료에 혁신이 일어났다.

18-19세기에는 노출된 상처에 공기 중 산소가 화학적으로 염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감염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상처를 붕대로 단단히 동여매는 게 치료방법이었다.

화농은 물론 상처 썩는 냄새가 병실에 진동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 치료의 개념이 없던 시기여서 병실에 환기 장치도 없었고 의사나 병원직원들이 손을 씻지도 않았으며 환자 상처를 세척할 시설도 없었다.

당시에는 수술 후 감염이 지나치게 잦아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이었다.

외과의사가 된다는 것은 무 마취 수술현장의 환자들이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과 몸부림뿐만 아니라, 수술실의 공기를 더럽히고 감염의 원인이 되는 부패한 살에서 나는 구역질 냄새에 단련된다는 의미였다.

1882년 조지프 리스터의 유방 절제수술 후 석탄산 스프레이 살균법(교과서 삽화).

이런 암울한 시대에 현미경에 관심이 많았던 영국의 조지프 리스터(1827-1912)는 그 당시 알려지기 시작한 파스퇴르의 논문을 읽었다.

“미생물들은 산소 없이도 부패와 발효가 된다”는 주장과 “이런 미생물을 죽이려면 미생물을 여과 하든지 끊여서 죽이든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화학용액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담긴 논문이었다.

마침 시(市)에서 하수도에 석탄산을 부어 독한 냄새를 제거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순수한 화학용액인 석탄산을 염증 상처에 뿌려 창상 괴저와 썩는 냄새를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그림은 유방수술 중 석탄산 스프레이를 이용하여 살균하는 삽화이며, 이후 절단 수술 후 사망률이 46%에서 13%로 감소했다. 

이후 리스터는 효과적인 살균 방법을 제시했다. 의사들은 깨끗한 장갑을 착용하고 수술 전후 5% 석탄산 용액으로 여러 번 손을 씻고, 수술도구들도 같은 용액으로 세척하며, 수술실 내에 용액을 살포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요오드와 같은 살균제가 더 개발됐다.

특히 그는 조직을 봉합할 때 봉합사 양끝을 길게 내놓고 매지 않던 과거의 방법대신, 양의 장(臟)을 재료로 하여 조직 속에 녹는 봉합사를 만들었다. 이는 현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무균법으로 유명해진 리스터는 영국정부로부터 남작의 지위와 영국 최고의 메리트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미국인들도 구강 청결제(리스터린)에 그의 이름을 넣어 존경심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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