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팔자 고치는 좌우명] <9>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완벽히 실천한 유한양행의 유일한(柳一韓) 회장. 그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이자 독립 운동가이면서 교육 사업가였다. 1895년 1월 15일에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평양 땅 유기연(柳基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부터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미국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철학박사·중화서당 원장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된 그는 노동을 통하여 건전한 생활태도를 익히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이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세운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를 다녔다. 그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미시간대학교와 대학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했다. 여기서 모은 돈으로 1922년에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세워 많은 돈을 벌었다.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의사 호미리와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업에 투신하였다. 그는 마침내 1925년에 귀국을 하였는데, 이때 서재필 박사로부터 손수 제작한 버드나무 CI를 선물로 받았다.

이듬해에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함으로부터 그의 국내 기업 활동은 시작된다. 그가 유한양행을 세운 동기는 결핵 등의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안티푸라민을 위시하여 다양한 약품을 개발하면서 유한양행의 사세는 크게 확장되었는데, 1939년에는 종업원 지주제를 한국 최초로 시행하였다.

유일한 회장 좌우명
그는 1946년 미국에 체류하다가 돌아온 후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전력하였다. 1971년 사망하면서 맏아들에게는 자립하라는 당부를 하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이 철저히 지켜져 지금의 유한양행에는 유일한 회장의 자녀들이 일체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유일한 회장이야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모범적 기업가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러한 삶을 살도록 인도한 에너지는 그의 좌우명에서 나왔다. 그의 좌우명는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이다. 그는 기업을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회의 행복을 위해 기여하는 공적인 집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기업을 통하여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려하였다. 

알려진 그의 사주에서 볼 때, 그는 임수(壬水)이다. 임수는 바닷물인데, 그가 태어난 계절은 한겨울이다. 추위가 심하면 물이 얼어 기세가 수축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생동감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를 이렇게 살아가도록 한 데에는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라는 그의 좌우명이 큰 기여를 하였다. 사람의 에너지는 자기만을 위할 때는 움츠러들고 대의명분을 앞세워 공적인 태도로 나아갈 때는 수 백 배로 증폭이 된다. 그의 좌우명은 그의 사주가 가진 단점을 잘 보완하였다고 하겠다.

“나는 결코 유한양행을 나의 사유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한 그의 말에서 보듯이, 그는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 기업경영을 하였다.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충실히 실천한 위대한 기업가였다. 유일한 회장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 또 재산의 사회 기부행위에는 그의 좌우명이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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