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124>

대전에 처음 온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대전이 꽤 큰 도시라고 생각한다. 대전에도 한적한 시골마을이 있다는 것을 몇 번 느낀 적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엊그제 대전시 서구 평촌동 기성초등학교 길헌분교장을 방문했을 때다. 그나마 평촌산업단지 개발로 시원스레 도로가 뚫리긴 했지만 추적추적 겨울비 내리는 날 찾아간 길헌분교는 추억 속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었다.

18가구 22명이 다니는 학교가 요즘 폐교 문제로 적잖이 어수선하다. 대전시교육청은 복식수업의 문제점을 들어 학생들의 수업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본교인 기성초등학교와의 통폐합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며 학부모들은 현재의 교육에 만족한다며 폐교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대전시의회와 교육청, 학부모, 주민들이 간담회를 가졌지만 존폐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임연희 교육문화부장
무엇이 학생들 위한 것인지가 길헌분교 존폐의 열쇠

그런데 간담회에서 오간 이야기를 종합하면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다. 무엇이 길헌분교 학생과 앞으로 이 학교에 입학할 예비 초등생에게 도움이 되느냐가 문제를 푸는 열쇠다. 오직 학생만 바라보며 이들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자는 데는 교육청과 학부모, 시의원들이 동의했다. 시의원들은 학생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숙고하겠다며 서둘러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이를 위해 교육청과 어른들이 무엇을 할지 논의하면 될 일이다. 이런 점에서 길헌분교 통폐합 문제는 속히 결론지을 일도 아니고 번거롭다며 논의과정을 생략해서도 안 된다. 지금은 22명뿐이지만 1964년 개교 이래 학교를 거쳐 간 동문들, 분교장을 공동체의 중심으로 여기며 살아온 마을주민들이 모두 길헌분교의 주인이다.

이런 점에서 대전교육청의 두 달만의 폐교추진은 성급했다. 매년 학생 수가 줄어들고 복식수업의 폐단이 있다지만 시간을 갖고 충분히 논의했어야 한다. 교육청은 학부모와 동문, 주민들을 대상으로 몇 차례 설명회를 가졌다지만 통폐합을 전제로 한 설명회와 분교장을 살리기 위한 설명회는 논의방식부터 다르다. 폐교가 목적이 아니었다면 분교장을 살리려는 노력부터 했어야 옳았다.

길헌분교는 현재 6개 학년을 두 개 학년씩 묶어 복식수업을 진행하는데 교육청은 학습 질과 교육 효과를 걱정한다. 내 생각에도 고학년을 2개 학년씩 묶어 수업하는 것은 수업 효율이 떨어지고 곧 중학생이 될 6학년 학생들의 수업결손이 우려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길헌분교 학부모들은 복식수업에 만족했고 6학년 학생 역시 5학년 때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복식수업을 하며 다시 배워 좋다고 말했다.

대전시교육청이 내년 2월 서구 기성초등학교 길헌분교장을 폐교할 예정인 가운데 학부모들은 통폐합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홈스쿨링, 대안학교보다 길헌분교가 좋다는 학부모들

복식수업으로 인한 수업결손을 메우기 위해 통폐합이 필요하다는 교육청의 주장은 여기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나 역시 많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하고 노는 것이 아이들의 사회성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학부모들이 만족하는 걸 보니 기우였나 싶다. 한 학부모는 초등 3, 4학년 두 아이를 홈스쿨링과 대안학교에도 보내봤지만 현재의 길헌분교를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반대로 기성초교와 빨리 통폐합이 이뤄져 아이를 본교에 입학시키고 싶다는 학부모도 있었다. 기성초교와 길헌분교 졸업생 대부분이 인근 기성중학교로 가는데 원만한 교우관계를 위해서는 분교보다 본교 초등학교를 다니는 게 낫다는 주장이다. 학부모들이 각자 자기 아이들을 위해 고민한 결과이니 무엇이 맞고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런 다양한 의견을 교육청이 세심히 듣고 통폐합 여부를 결정하면 좋겠다.

폐교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교육부로부터 통폐합 인센티브 30억 원을 받기 위해 교육청이 무리하게 폐교를 추진한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한 해 예산이 1조8000억 원에 달하는 대전교육청이 인센티브 30억 원에 아이들을 볼모로 통폐합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더구나 학생들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통폐합하는 것이라면 학생과 학부모의 동의는 필수다.

혁신학교나 공립형 대안학교 같은 작은 학교 살리기 방안 필요

몇 달 전 대전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자유발도르프학교에 가봤다.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발도르프 교육을 하기 위해 5가구 학부모들이 2년간 부지를 물색하고 조립식 건물을 올려 손수 만든 작은 학교에는 4명의 학생과 두 명의 교사가 전부였다. 획일적 교육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경쟁이 아닌 협동을 배우는 아이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책상 하나, 칠판 하나도 학부모들이 십시일반 사야하고 교사들의 인건비도 분담해 교육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전교생이 4명밖에 안 되니 운동회와 단체 활동을 하기도 어렵다. 교사는 학생을 진심으로 대하고 학생도 교사를 신뢰하면서 창의적 대안교육의 싹을 틔우지만 제도권 밖 학교라는 이유로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애를 태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대전교육청은 당장 길헌분교를 폐교해 인근 학교와 합치려고만 할 게 아니라 작은 학교를 살리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발도르프학교 만큼은 아니라도 공교육에서 할 수 있는 혁신학교나 공립형 대안학교 같은 형태로 길헌분교를 활성화하는 시도는 해볼 만하다. 앞으로도 학생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할 텐데 그때마다 학교 문을 닫기보다는 학생, 학부모, 주민들과 상생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며칠 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지하철역 앞에서 출산율 감소와 도심공동화로 폐교 위기에 처한 서울지역 5개 작은 학교를 살리자는 전단을 나눠 주며 "작지만 가고 싶은 학교로 만들 테니 아이를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설동호 대전교육감이 “학생 수 22명의 작은 분교장이지만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길헌분교도 대전형 작은 학교로 재탄생할 수 있다. 폐교는 가장 나중에 선택해도 늦지 않다. 길헌분교를 통해 설 교육감이 주장하는 ‘행복한 학교, 희망의 대전교육’ 모델을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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