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팔자 고치는 좌우명] <10> 모르는 사업에는 손대지 말라

한진그룹 조중훈(趙重勳) 회장은 이 나라 운송업계의 독보적 존재다. 그는 1920년 2월 11일에 인천시 항동에서 직물 도매업을 하던 조명희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성급하고 행동력이 강하며 두뇌회전이 빨랐다. 그는 휘문고보에 입학한 후 곧바로 자퇴서를 내고 경남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에 입학 후 2년 만에 졸업했다.

철학박사·중화서당 원장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가서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따고 실무 경험을 쌓은 이후 고향에다 자동차 엔진 수리공장인 이연공업사를 차렸다. 사업은 발전해 나갔으나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이연공업사를 강제 매입함으로써 사업이 중단되었다.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11월에 이연공업사를 정리한 자금과 그간 모아둔 자금을 기반으로 운송업체인 한진상사를 설립하였다.

1957년에는 처음으로 미군과 7만 달러짜리 수송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세가 급성장했다. 1961년에는 서울~인천 두 지역을 이어주는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한진고속의 시초다. 이후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으로 상호를 바꾸어 항공업에 뛰어 들었고, 1977년에는 컨테이너 해운업체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육상과 공중, 해상의 세 공간에 운송사업을 펼침으로써 그야말로 ‘육해공의 운송사령관’이 된 것이다.

조중훈 회장 좌우명
그는 자서전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말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송은 인체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공간의 이동은 삶의 필수적 요소이고, 시간의 단축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이다” 수송을 인체의 혈맥에 비유한 것은 그의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의 사업방식은 신용을 중시하였고, 특히 문어발식 확장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경계하는 그의 경영원칙은 “모르는 사업에는 손대지 말라”고 한 그의 좌우명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운송업에만 집중함으로써 세계적인 운송업체를 만들 수 있었다.

사주상에서 볼 때 그가 태어난 날의 간지는 정해(丁亥)이다. 태어난 날의 천간인 정(丁)은 그 사주의 주인공을 상징한다. 해(亥)는 사물로 보면 바다에 해당하며, 신살로 보면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징하는 지살(地殺)이 있다. 지살은 역마살처럼 ‘돌아다닌다’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정해일은 자신을 상징하는 ‘정(丁)’이 지살인 ‘해(亥)’ 위에 있으므로 이동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가 운송업에 투신한 것은 사주팔자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의 천성이 적극적인 행동파의 모습을 가진 것도 자신이 지살 위에 있기 때문이다. 지살이 있으면 활동적인 스타일로 일한다. 활동적인 스타일의 사람은 당연히 일을 확장시키려는 성질을 가진다. 활동적인 사람은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강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이런 식으로 살면 내실을 쌓기가 어렵다. 조중훈 회장의 천성에는 이렇게 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 상황에서 “모르는 사업에는 손대지 말라”고 하는 그의 좌우명은 그의 행동력을 억제시키고 내실을 다지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행동력이 지나친 그를 염려하여 ‘고요정[靜]’자와 ‘돌석[石]’자를 써서 ‘정석(靜石)’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여기에는 매사를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라는 아버지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의 호도 역시 그의 좌우명처럼 지나치게 활동적인 그의 성격적 단점을 보완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조중훈 회장은 늘 국익을 염두에 두었고, 신의를 중시하는 경영을 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경영스타일을 유지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강한 행동력을 가졌지만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그의 경영정신을 배우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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