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여전히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힘은 우리의 생존과 융성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를 도우려 하는 미국의 힘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동맹 관계를 약화시키거나 철회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재앙이다.”

안희정이 3년 전에 낸 책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미국관(觀)’이다. 본격 대선 레이스에 나선 지금은 어떨까? 안희정은 그제 외신클럽초청 기자간담회에서는 “언제까지 미국만 바라볼 수 없다”며 “힘찬 국방의 첫 과제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선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 정부 간 협상을 통해 결정한 것은 그것대로 존중하겠다는 것이 저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전시작전권 환수와 사드 배치 존중에는 괴리가 있다. 

안희정의 미국관 ‘원교근공’ 출발하나?

안희정의 미국관은 진정 무엇인가? 그는 <산다는...>에서 미국과 가까이 지내야 할 이유로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론을 들고 있다. “국경을 맞댄 강대국은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 위험성이 높다. 반면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강대국은 동맹을 맺어 힘을 빌릴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하다. 이미 동맹을 맺은 미국이라는 자산을 훼손하면서 중국을 향해 서둘러 구애하는 것은 바람직한 외교정책의 전환이 아니다.”

안희정은 그의 책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에서 미국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원교근공론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철회해선 안 된다는 소신의 근거이며, 사드 배치 존중 입장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안희정의 미국관은, ‘한국대통령이 미국에 먼저 가야 한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는 문재인, ‘언제까지 끌려 다니며 미국의 봉노릇 할 거냐’는 이재명과는 차이가 크다. ‘진보좌파 386세대 정치인’의 대표주자라는 느낌을 주는 안희정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진보진영에서는 비판받고 있다. 한 정의당 의원은 “안 지사는 마치 사드배치가 잘 결정된 것처럼 말함으로써 그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표출했다”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안희정은 어제도 “진보 진영은 서운하다고 하고 반대 진영은 기특하다고 하는데 어떤 입장에 화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지도자는 용기있게 걸어가야 한다”며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미국에 대한 안희정의 입장은 일관성이 있다. 민주당이 한미 FTA 반대에 열을 올릴 때도 그는 그리 반대하지 않았다. 한미 FTA 불가피하다는 쪽이었다. 문재인 이재명이 대선후보로써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하고 있지만 안희정에겐 그런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미국에 대한 ‘정치적 입장’ 갈려 있는 한국 정치인들

우리나라 정치권은 진영에 따라 미국을 바라보는 ‘정치적 시각’이 기본적으로 다르다. 개인적 취향이야 어떻든 정치인으로서 미국을 대하는 정치적 입장은 진보와 보수가 갈린다. 현재 야권과 진보진영에선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은 데 비해 여권과 보수진영에선 긍정적 시각이 많은 편이다.

야권에서 대선후보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미국 편을 들어주는, 사드 배치 존중 입장을 밝히는 것은 그의 말대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의 박정희에 대한 공칠과삼 평가보다 훨씬 소신있는 발언이다. 일부에선 보수층을 겨냥한 전략으로 보기도 하지만, 표 계산 때문이라면 굳이 원교근공이론까지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가까운 나라보다 멀리 떨어진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게 낫다는 게 고대의 원교근공책이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다시피한 첨단 글로벌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인가 하는 의문점은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원근(遠近)’은 외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사드 배치는 양강 시대 한국의 입장에 대한 질문

사드 배치는 북핵 문제 때문에 촉발된 사안이지만 실질적으론 두 강대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다. 사드 배치에 찬성하면 미국한테 붙자는 것이고 반대하면 중국한테 붙자는 것이다. 물론 일방적인 친미나 친중은 바람직하지 않고 현실성도 없다(안희정은 국민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중립국을 선언하지 않는 한, 외교는 사드의 경우처럼 결국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중국 편을 들면 우리 기업이 가까이 있는, 넓은 중국 시장을 상대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으나 우리의 정치적 발언권은 약해지기 쉽다. 반대로 계속 미국 편을 들면 경제적으론 불리하지만 국가의 ‘정치적 존재감’은 유지할 수 있다.

북한 문제를 푸는 데도 차이가 있다. 한국이 미국과 거리감을 둘 때 한반도가 더 위험에 빠지는 건 아닌지, 반대로 한국이 중국과 멀어질 때 북한이 끝내 중국에게 먹히는 꼴이 되고 마는 건 아닌지 등도 판단해야 할 문제다. 우리가 중국과 손을 잡을 경우 우리와 일본의 문제도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선택이 초래할 수 있는 극단적 결과들이긴 하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동아시아는 신흥 강국 중국과 기존 강국 미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부딪치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 전선(戰線) 중 한 곳이 우리나라다. 중국 군용기가 지난 9일 한국방공식별구역을 대거 침범했다. 사드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다.

이런 일이 더 심해지더라도 이를 묵인하기로 마음먹지 않는다면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신 우리는 중국의 경제 보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이익’이냐 ‘경제적 이익’이냐에 대한 선택의 문제인 셈이다. 먼저 실감하는 것은 중국의 경제 보복이다. 중국 진출 기업의 피해가 늘고 있고 연예계의 한숨도 길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위기로 치달을 때마다 우리는 미국 쪽만 쳐다보는 처지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번 대선에선 ‘외교 문제’ 부각될 수도

오래 전에 중국에서 시집온 한 분에게 들었다. 중국보다 한국이 정말 좋다는 한족(漢族)이다. 올 연초 친정에 가기 위해 중국대사관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국 부모의 신분증과 묵을 호텔과 객실번호까지 복잡한 서류를 요구하는 안내문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전에는 없는 요구다. 비용도 50%나 올랐다. 사드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다. “중국에 살던 경험으로 보면 보복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슬프다”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에 따른 이번 대선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선거가 될 수 있다. 그동안은 대선에서 외교 안보 문제가 표심의 변수로 등장한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풍 문제’는 있었지만 외교 문제를 놓고 국민들이 크게 고민하는 선거는 없었다. 이번엔 외교 문제가 주목받을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외치에 능한 대통령을 원하는 선거가 될 수 있다. 물론 외교관 출신이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여당은 무조건 찬성하고 야당은 무조건 반대하는 풍토에선 사드도 ‘정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소재’로 변질되기 쉽다. 그런 점에서도 사드 반대파가 많은 야권에서 안희정이 찬성 의견을 낸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사드 배치 문제를 현실로 다가온 ‘미중 양강 시대’에 한국의 입장을 묻는 절박한 질문으로 삼았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난국을 이겨낼 힘과 지혜(단결력 등)가 나올 수도 있다. 우리의 위기는 어쩌면 두 강대국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분야마다 기본이 너무 무너져 있고, 필요 이상 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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