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왕은 이들의 청을 빌미로 여불위의 목숨만은 살려두기로 했던 것이다.

노애 사건으로 궁내부가 아수라장이 되는 동안 진왕은 침전을 지키고 있었다.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날들의 굴욕을 그제야 씻고 있었다.

한편 통쾌했고 다른 한편 마음이 우울했다.

죄인으로 거명되어 죽어간 이들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들 중 일부는 살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국 여불위와 태후를 내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왕은 그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술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른 다음 길게 들이켰다. 술을 마셔도 마셔도 취기는커녕 정신이 도리어 또록또록 되살아났다. 문밖에서는 연신 비명이 번져갔다.

그럴 때마다 진왕은 술잔을 기울였다. 아마도 수십 잔은 더 기울였을 법했다. 술이 떨어지면 내관을 시켜 다시 가져올 것을 명했다.

한잔은 지난날의 굴욕을 위해 다른 한잔은 죽어가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 마셨다. 또 다른 잔들은 다가올 영광을 위해 마셨다.

진왕은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문밖에 섰던 내관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아뢰었다.

“대왕마마. 소신의 부득으로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하나이다.”

“그 무슨 말이냐. 네가 고하지 않았다면 내 어찌 그자들의 죄상을 밝힐 수 있었겠느냐. 또 이번 거사를 성공리에 매듭지을 수 있었겠느냐. 날이 새면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내관이 연신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오늘은 마음껏 술을 마시고 싶구나. 마다말고 술을 가져오너라.”

“알겠나이다. 대왕마마.”

내관은 침전에서 물러나 술상을 다시 보도록 한 다음 초란을 급히 수배하여 그녀를 들게 했다. 진왕이 그녀를 유달리 예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숱한 궁녀들이 죽음을 피해 도망을 치다 결국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초란이었던 터라 바르르 떨며 침전으로 들었다.

쪽빛을 바른 듯 그녀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웃음을 잃은 여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진왕의 거친 숨소리, 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만 침전에 퍼져갔다.

진왕이 비스듬히 눈을 들며 입을 열었다.

“과인이 심히 외롭도다. 너마저 없다면 이 외로움을 누구와 함께 할꼬.”

초란은 진왕의 말꼬리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

“이 비천한 계집이 대왕마마의 외로움을 천만분의 일이라도 들어드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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