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팔자 고치는 좌우명] <15> 상선약수(上善若水)

풍운 속의 정치인 김종필(金鍾泌)은 한국 현대사의 곳곳에 이름이 올라있다. 그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 사범대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8년에 제8기로 졸업하였다. 1958년에는 육본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61년 5·16 때는 박정희를 도와 군사정권의 탄생에 앞장섰다. 이후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을 거치면서, 1971년에는 공화당 부총재에 올랐다가 다시 국무총리가 되었다.  

철학박사·중화서당 원장
이후 제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그는 신군부에게 핍박을 받다가 1987년에 공화당을 재건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90년에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3당 합당을 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그는 여기서 최고위원과 대표위원을 지내다가 민주자유당 내의 민주계로부터 구세력으로 지목되어 배척을 받다가 1995년 2월에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1997년에는 DJP연합을 결행하였다. 당시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이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사건을 터뜨리자 김대중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김대중은 김종필에게 ‘공동정부의 수립’과 ‘의원내각제 실시’를 주요조건으로 하여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정치적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때 영남권의 박태준도 참여함으로써 DJP연합을 결성하였고, 이 덕분에 김대중은 1997년에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공동정부 형태로 국정이 운영되었으나 김종필의 장관임명권에 불만은 품은 동교동계와의 충돌이 주원인이 되어 염원하던 의원내각제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 2001년에 DJP연합은 파국을 맞았다. 그러다가 2006년 2월에 이르러 결국 자민련은 한나라당과 통합을 이룸으로써 당의 간판을 내렸다.

김종필 총재의 좌우명
그의 세상을 보는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늘 세력이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보다는 남의 보조자 역할을 하다가 버림을 당하는 경향이 많았다. ‘박정희 아래의 2인자’, ‘3당 통합 이후 민주계로부터의 배척’, ‘DJP연합 시절 동교동계로부터의 배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그의 사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겨울의 병화(丙火)이다. 병화는 태양이다. 겨울 병화는 만물이 얼지 않도록 빛을 내려 남을 돕지만, 자기는 실속을 거두지 못한다. 이것이 겨울 병화의 운명이다. 

게다가 그의 사주는 신약하여 강력한 영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것이 큰 문제였다. 능력은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밑지지 않지만, 그 능력을 독자적으로 발휘할 힘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힘이 고갈되므로 학문이나 예술로 에너지를 비축하려 했다. 신약한 그가 억센 세상에서 살아남자면 자기에게 꼭 맞는 심리적 트레이닝을 했어야 했다. 그것은 좌우명이 시켜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좌우명은 그의 사주가 가진 단점을 더 악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그의 좌우명은 ‘상선약수(上善若水)’이다. 이는 노자의 말로 ‘물처럼 유연하게 살라’는 뜻이다. 본래 유연한데 더 유연하라고 하면 결국 무력해지고 만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래서 그는 늘 남만 좋게 해주고 자신은 실속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소원인 의원내각제도 이루지 못했고, 또 3김 중에 자신만이 일개 당의 명예총재로 정치인생을 마쳤다. 이것은 타고난 운명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악화시켰기에 나타난 비극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심원한 계책과 유연한 태도는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날의 얕은 수준의 정치인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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