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팔자 고치는 좌우명] <16> 입천하지정위(立天下之正位) 행천하지대도(行天下之大道)

대쪽판사 이회창(李會昌)은 청렴과 기개로 이름난 대한민국 대표적인 법조인이다. 그는 1935년 6월 2일 황해도 서흥에서 이홍규(李弘圭)와 김사순(金四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및 선대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다.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인 1957년에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1960년에 법관으로 임용되었다.

철학박사·중화서당 원장
군사정권 때는 정부의 요청보다는 자신의 법적 소신을 더 중시하므로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6년 4월에 대법관에서 물러났으나 노태우 정부 때 잠시 복직했다가 퇴직했다. 1993년 3월 김영삼 정부에서 감사원장, 1993년 12월에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총리로서의 소신이 관철되지 않자 취임 127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그를 신한국당에 영입하였다.
 
1997년에는 신한국당 대표에 올랐으나 한나라당을 다시 창당하여 ‘3김정치 청산’을 외치며 김영삼 대통령과 정치적 차별화를 꾀하였다. 1997년의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나갔으나 두 아들의 병역관련 문제인 이른 바 ‘병풍(兵風)’, 그리고 김영삼과의 반목, 이인제의 경선불복 등이 주요원인이 되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석패하고 말았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다시 나갔으나 ‘차떼기 정치자금 모금사건’과 ‘병풍’이 주요 원인이 되어 다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병풍은 이회창의 두 아들이 병역을 기피했다는 의혹인데, 이는 사실여부를 입증하지 못하였다. 2007년에는 무소속으로 제 17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하였다. 2008년에는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대표에 올랐으나 2011년에 당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법관으로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격랑의 정치판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이회창 전 총재 바른생활 좋아하는 인품... 유연성 결여

이회창 전 총재 좌우명
사주에서 보면 그는 기토(己土)이다. 기토는 음성의 흙으로 섬세하면서 신뢰가 있다. 그리고 사월(巳月)에 태어나니 인수(印綬)로 그 성품이 고지식하다. 결론적으로 바른생활을 좋아하는 인품으로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만약 그가 유연성을 더 길렀다면 대통령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이 되어서도 유연성보다는 판사 때의 대쪽 이미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좌우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의 좌우명은 ‘입천하지정위(立天下之正位) 행천하지대도(行天下之大道)’이다. 이는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가 제시한 이른 바 ‘대장부론(大丈夫論)’에 나오는 말이다. ‘바른 자리[正位]’와 ‘큰 도리[大道]’는 사람의 정서를 단정하면서도 경직되게 한다.

이 좌우명은 강직한 천품을 가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정치인의 길을 가는 그에게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엄숙한 천성을 더 엄숙하게 하면 유연성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가 만약 김영삼과 이인제, 그리고 충청권 맹주인 김종필에게 유연한 자세로 대했다면 틀림없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법관과 정치인은 그 체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가 이 점을 잘 간파함과 아울러 좌우명으로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조화롭게 가꾸었다면 정치인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아마 그의 가슴 속에는 깊은 회한이 서려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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