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박사의 그림으로 만나는 천년 의학여행] <29>초기의 의사들

이승구 선병원재단 국제의료원장 겸 정형외과 과장.

옥스포드 사전을 보면 ‘쾍 닥터’(Quack Doctor, 돌팔이 의사)라는 말이 있는데, 의학 기술과 치료에 대해 깊이는 없으면서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떠돌이 의사나 약사를 칭한다고 한다.

그림1은 1600년대 돌팔이 의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번잡한 시장에 높은 단상을 만들어 놓은 뒤 원숭이 한 마리를 데리고 있고, 위엄 있게 보이느라 대학교수 가운을 걸치고 있다.

중국식 우산을 펼쳐놓고는 그 아래서 자신이 만든 접시에 담긴 약을 팔기 위해 큰 소리로 선전을 하고 있다.

빵을 파는 여자아이들과 잡상인들이 모여 있고, 앞의 사냥꾼은 돌팔이의 약에 관심이 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주부는 회의적인 표정이다. 돌팔이가 팔려는 약이 사랑의 묘약일까? 사냥꾼의 왼쪽에 서 있는 남녀가 서로 웃으며 속삭인다.

17세기까지 의사들의 진단 기술은 기껏 맥박 잡는 것과 소변 색깔을 보는 것뿐이었는데, 토머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가 소변 맛에서 단맛이 있음을 느끼고 당뇨병을 발견했다.

이후 소변으로 모든 병을 진단하는 소위 ‘소변 예언자(pisse-prophet)’들이 한동안 득세했다. 그림2의 시골의사(Village Doctor)는 초라하고 빈약해 보이는 진료실에서 큰 의학책을 펼쳐보고 있다.

소변을 흔들어 보고 있는데, 색깔, 혼탁도, 이물질 유무 여부, 냄새, 맛보기 등으로 진단을 내릴 것이다. 앞의 환자는 자기 소변 가검물을 흔들고 있는 의사가 무어라 말할까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 조수는 뒤쪽에서 약초를 조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3을 보면 점차 의사 가운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엄 있어 보이는 검은색 망토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진료실의 인테리어도 화려하게 변해 양탄자에 화려한 물병들이 보인다.

그러나 환자를 위한 진단과 치료법은 거의 발전이 없어 역시 소변 등의 검체물을 흔들어 보는 게 전부다. 탁자에는 방혈(blood letting, 치료의 목적으로 혈액을 체외로 방출하는 것)에 쓰이는 피를 뽑아 보관하는 동(銅) 그릇이 놓여있다.

18세기 후반의 의사들은 현대 의사들과 외형상 가장 접근해 있다. 그림4의 윌리엄 글리슨(1780)은 성공한 영국 의사인 것처럼 보인다. 고급스러운 벨벳 가죽 코트에 승마용 바지, 박차가 달린 장화를 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을 타고 교외(郊外)로 왕진을 온 게 분명하다.

오른손에는 당시 의사들의 필수 지참물이자 상징인 은(銀)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다. 그 시기의 영국,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은 극히 종교적이고 엄격한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에 여성 환자의 진찰을 위해 커튼 속에서 손목의 요골동맥 맥박을 재고 있다.

옛날에는 의사가 요즘과는 달리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고, 특히 초기에는 떠돌이 약장사로서 시골 장바닥에서 소리쳐 스스로 만든 약이나 고약 등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점차 시대 변천과 의료 발전에 힘입어 의사의 품격과 사회적 신분이 상승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는 의사들의 가운, 옷차림, 사회적 신분 상승 등을 당시의 주거 환경 등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림1=‘돌팔이 의사(The Quack Doctor)’ 헤리트 다우(Gerrit Dou), 1652년,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로테르담).

그림2=‘시골의사(The Village Doctor), 데이비드 테니어 2세(David Teniers II), 1650년, 벨기에미술관.

그림3=‘내과 의사(The Physician), 헤리트 다우, 1653년, 빈 미술사박물관(오스트리아).
그림4=‘윌리엄 글리슨(William Glysson)’ 위스럽 챈들러(Winthrop Chandler), 1780년, 오하이오역사학회 소장.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