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휴지조각 된 ‘6개월 예규’

김학용 주필
지방자치단체장의 재판이 지연되면 피해가 크다. 특히 단체장의 지위가 걸린 재판이면 조직 전체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대법원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범죄사건의 신속처리 등에 관한 예규’를 고쳐,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르면 1, 2, 3심 재판을 각각 2개월 안에 종결하기로 했다.

선거법 위반 자치단체장 26% 1년 반 넘도록 재판중

그 예규는 지금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말 <연합뉴스>가 전국종합으로 보도한 ‘자치단체장 재판현황’ 등에 따르면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선거법위반으로 걸려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중인 자치단체장은 23명(교육감 2명 포함)이다. 당선무효가 걸린 재판에서 예규가 지켜진 곳은 거의 없다. 6명(26%)은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이다. 대부분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는 중이다. 권선택 대전시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권 시장 재판이 지연되면서 4월 총선 이후에나 대법 판결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벌써부터 나돈다.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대법원 마음이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던 김태환 제주지사는 1,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았으나 대법에서 뒤집고 살아났다. 사건 시작 1년 반이 넘어서였다. 파기환송을 거쳐 최종 무죄 확정까지는 3년 가까이 걸렸다.

권 시장의 재판은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 능력의 문제’를 다투는 점 등에서 당시 김 지사의 재판과 유사한 면도 있으나 수사와 재판 진행 전반에서 보면 두 재판이 같지는 않다. 향후 권 시장의 재판 일정과 그 결말은 전적으로 대법원에 달렸다. 대법원도 재판 지연이 지방행정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을 것이므로 한정 없이 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권 시장의 경우처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자치단체장 재판은 이미 ‘최악의 재판’이 되었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지방자치단체장 재판은 늘어지는 것보다 나쁜 재판은 없다. 단체장의 당선무효가 걸린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 단체장이 이끄는 조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단체장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고, 공무원은 이런 수장(首長)의 말을 잘 따를 리 없다.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 공무원들이 많다. 한 시의원은 “시장은 물론 의장까지 일치를 본 사안인 데도 담당 공무원이 업무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시장이 바뀌면 다시 바뀔 일을 왜 하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단체장이 재판을 받는 조직에는 이런 분위기가 쫙 깔려 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해소되기 힘들다.

정확한 재판보다 신속한 재판 필요한 자치단체장

대법원은 지방자치단체장 재판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혹자들은 “그렇다고 재판을 허술하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정확한 재판과 신속한 재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지방자치단체장의 재판에 관한 한 신속한 재판이 낫다. 아무리 공정한 재판이 이뤄진다고 해도 지역과 조직에 큰 피해를 준 뒤에 결과가 나온다면 무슨 소용인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고어 후보는 득표수에서 부시를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는 271대 267로 뒤져 패했다. 접전이 펼쳐졌던 플로리다 일부 선거구의 재검표 결과 두 후보의 표차는 400여 표까지 줄었다. 재검표를 계속하면 당락이 뒤바뀔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연방대법원은 검표를 중단시키고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고어는 억울했지만 수용했다. 국가적 혼란을 막기 위함이었다.

개인의 권리가 공익과 충돌할 때 개인의 권리는 종종 제한된다. 지방자치단체장은 그 지역의 일꾼을 자임한 사람들이다. 지역 이익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재판받을 권리’의 일부를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대통령이나 시도지사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또 ‘신속 재판’이 당사자에게 반드시 불리하다고 볼 수도 없다. 신속 재판 자체가 단체장에게 유불리의 변수는 아니다.

대법원이 ‘6개월 이내 결판’을 약속했던 것도 정확성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신속성을 우선하겠다는 뜻 아니었나? 그렇지 않고는 신속재판을 실천할 방법이 없다. 대법원은 예규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의지만 있다면 실천 방법도 있다. 대법 예규대로라면 선거 후 6개월 내 기소를 합해 1년이면 모든 게 끝나야 한다. 그러나 상급심, 특히 대법원에서 지연되는 사례가 더 많다. 권 시장 재판도 대법으로 넘어간 지 반 년이 넘었다.

“상급심 재판 늦으면 하급심 따르거나 무죄 기소 유예 방식으로..”

앞으론 이렇게 하면 어떨까? 2심에서 2개월 내 결과가 안 나오면 1심의 결과와 같은 것으로 인정하고, 상고심에서 2개월 내 결과를 못 내면 하급심 결과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대법원도 예규의 실천을 다짐하면서 ‘가급적 1심의 결과를 존중한다’는 지침까지 넣었다. 1심의 경우도 기한 내에 재판을 끝내지 못하면 무죄로 간주하거나, 단체장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재판을 유예하는 방법이 있다.

모든 선거사범을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낙선자는 충분한 재판기간을 둬도 좋으나 자치단체장 재판에 대해선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 광역단체장인 시도지사라면 더욱 그렇다. 대전은 인구 150만에 예산 규모가 4조 원이 넘는다. 산하 직원만 수천 명이다. 이런 조직이 1년 반 넘게 겉돌고 있다.

전국의 기초단체까지 합하면 선거 때마다 수십 조 예산에 수만 명의 조직을 혼돈과 비효율로 몰아넣는 자치단체장 재판이 최대 2년 가까이 진행된다. 얼마나 큰 낭비인가? 국회의원은 여러 명이 재판을 받아도 국회 전체 기능에 큰 지장이 없다. 지방의 살림꾼인 시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과는 다르다.

대법원은 지방의 실정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규’가 이리 쉽게 휴지조각처럼 되겠는가? 우리나라 정부 예산은 올해 386조 원이다. 그 중 60%는 지방을 통해 집행된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의 상당수가 수장의 재판 때문에 1년에서 2년 가까이 흔들리는 조직으로 방치되고 있다. 법원은 스스로 약속한 ‘6개월 예규’를 지켜야 한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