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특별기고] 국학박사 | 향토사학자

본명이 정갑수(丁甲秀)인 소정(素汀) 정훈(丁薰, 1911-1992)은 박용래(朴龍來, 1925~1980), 한성기(韓性祺, 1923-1984)와 함께 대전의 3대 시인으로 불린다. 대전 근대문학의 초석을 다져 대전 문학사에서 그 이름 석 자가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가 무려 50여 년을 거주하며 문학작품을 창작했던 대흥동 고택(50-7번지)은 당연히 문학사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런 정훈 시인의 고택이 한 노인전문병원에 주차장용으로 팔려 지난 7일부터 8일 오전까지 철거됐다. 7일 오후와 8일 오전 고택이 철거되는 현장에 가보니 어떤 문인도, 어떤 신문 기자도, 어떤 공무원도, 어떤 주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철거에 동원된 인부와 굴삭기, 트럭만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렬한 햇볕이 사정없이 내려쪼여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굴삭기와 트럭들. 그 기계들이 움직일 때마다 내는 시끄러운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해도 가족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막노동을 열심히 하는 인부들의 몸부림이 나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정훈 선생 고택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건물 잔해만 앙상하게 남은 황량한 모습을 보니 너무 황당하고 허무해졌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이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말았다.

8일 오전 11시 30분경 대전 문학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대전 문인협회 사무실에 들러보니 여성 간사 한 분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전 문협에서는 대흥동 정훈 고택이 이미 매각되어 7일부터 철거에 들어간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6월 말부터 시작한 서명을 계속 받고 있었다.

서명부를 보니 8일 오전까지 230명의 문인들이 서명에 참여한 것으로 돼 있었다. 또 중구청, 대전시청, 도시재생본부 등 관계 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지방신문사 기자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했다고 했다. 그래서 대전 중구청 공보실에 가서 8일자 한 지방신문을 보니 3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돼 있었다.

“충청시단의 선구자인 ‘정훈 시인’의 고택을 살리기 위한 범시민 운동이 본격화됐다. 대전예총과 대전민예총을 비롯해 대전문인협회, 대전작가회의, 호서문학회 등 10개 문인단체는 7일 오후 3시부터 대전시청역 2번 출구 앞에서 소정 정훈 선생 고택 살리기를 위한 탄원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정훈 선생의 고택은 최근 인근 요양병원이 매입키로 계약했으며, 오는 15일까지 잔금을 치르게 되면 소유권이 최종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서명운동은 시작 40분 만에 150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면서 정훈 선생 고택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증명했다. 이날 서명운동에 참여한 시민 이종만(67) 씨는 “문화의 발자취를 보존키 위해 시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문인단체들은 향후 대전시장에 탄원서를 전달하는 한편으로, 매입자인 요양병원 측에 매입보류 요청과 정훈 시인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엄 등을 지속해서 개최한다는 방침이다.“

대흥동 정훈 고택은 이미 매각 절차를 끝내고 7일부터 철거에 들어갔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헛수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사후 약방문’, ‘버스 지나간 뒤에 손들기’ 등과 같은 속담들이 실감났다.

대전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와 근현대 건축물들이 하나 둘 사라져버려 정말로 안타깝고 어처구니없고 한심하다. 이미 박용래 시인의 오류동 고택은 사라진지 오래됐고, 보문산 청심등대세계평화텁은 한 달 전에 전격 철거됐으며, 정훈 시인 대흥동 고택도 8일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그나마 지난 6월 중순 대전문협 권득용 회장이 정훈 시인 고택이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 200여점의 유품을 가져온 게 다행이다. 그 중 25년간 창고에 방치되어 곰팡이가 피고 좀이 슨 <피맺힌 연륜(年輪)>을 찾아내 챙긴 것은 큰 수확이다. 이 책은 1957년 정훈 시인이 과거에 쓴 시를 육필원고로 정리한 시집이다. 이런 귀중본은 관리 소홀로 인해 도난당하거나 부식될 우려가 있는 만큼 개인이 소장하지 말고 대전문학관에 기증하여 영구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전통문화와 근현대 건축물은 일단 철거되어 사라져버리면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철거보다는 유지 보수하는 방향으로 문화재 관련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제는 시민단체들이 전면에 나서서 지자체와 문화재청의 문화재 관리 실태를 점검하고 감시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와 근현대 건축물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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