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 칼럼]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2012년 10월3일.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좋았다. 추석이 지난 후 가을 하늘은 청명하다 못해 깨질 듯이 맑았다. 아침부터 장모님께서 안절부절 못하신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몸 둘 바를 모르신다.

“어디 가고 싶으세요?”하고 물으니 “새재 한 번 갔다 왔으면 원이 없겠어”라고 하셨다. 점심 먹고 아내에게는 어디 간다는 말도 않고 그냥 출발하였다. 주소도 모르고 단지 아는 것은 장모님께서 어렸을 때 ‘지우대’까지 걸어서 담배 심부름했다는 것과, 영동 어딘가에 ‘새재’라는 마을이 있다는 것뿐이다. 대화중에 심천 이야기도 나오고, 동이면 이야기도 나왔다. 내비게이션에 동이면사무소를 찍고 달렸다.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볼 심산이다.

동이면에 도착하니 대충 기억나는 것이 있으신가 보다. 지우대를 찾으니 사람들이 알려주는데, 늘 다니던 금강휴게소 옆이었다. 거기서 매운탕을 먹은 적도 있었다. 다시 그곳에서 ‘새재’를 물었고, 새재 근처에 가서는 61년 전의 마을 이름을 대면서 장모의 고향을 찾았다. 다행히 산꼭대기 마을을 알려주면서 그곳이라고 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도착하니 장모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어려서 살던 집은 사라졌고, 마을 어른을 만나니 금방 알아보시고 “억쇠오빠 아니우?” 하신다. 두 분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면서 옛날이야기에 정신이 없다. 그 주변에 있는 번*이라는 분의 집에 가서 동생이라며 만났고, 그 아내를 올케라고 불렀다.

그렇게 시집간 후 처음으로 찾았던 고향방문(61년만의 귀향)을 마무리했다. 그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모님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수 십 번도 더 하셨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향인데 왜 그리 가보지 못했던가? 그 후 필자는 장모님께 몇 번을 더 가 보자고 했지만 결국 그것이 마지막 방문이 됐다.

그리고 얼마 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혈관성치매와 알츠하이머 치매라는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평소에 보지 못했던 행동을 하셔서 오죽하면 보호자 들어와 있으라고 하기도 하셨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놀랐지만 아프면 어쩔 수 없나보다 했다. 그 후 병원과 집을 반복해서 드나들며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정말 법 없이도 살 어른이었다. 아니 법이 있어야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착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니 법이 있어야 살 수 있는 분이기도 했다. 작년 여름엔 담석을 10개 제거하기도 했다. 늘 아프다고 하시면서 처녀 때부터 가슴앓이가 있었던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식사도 못하고 통증을 호소하시기에 이왕 굶은 김에 내시경이나 해보자고 하였다. 의사는 체력이 약해 내시경은 할 수 없고, CT촬영이나 한 번 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날로 청주 큰 병원으로 가서 바로 수술하였다.

담석을 그렇게 많이 넣고 계셨는데 모르고 있었던 불효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단지 치매로 인한 심인성 복통이라는 말만 믿고 몇 년 동안 복통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진통제만 맞고 다음날 퇴원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수술 후 병원에서 출퇴근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체력이 회복된 후 다시 재가노인복지원에 다니면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다.

지난 3월에는 손자의 결혼식은 꼭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서울 예식장에는 꼭 가겠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모시고 갔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부터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셨다. 곧장 큰 병원에 갔더니 청천벽력으로 얼마 못 사신다고 한다. 허리가 아파서 척추 X-Ray만 찍어 보았는데, 이 정도면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있을 확률이 99%란다. 또 다시 대학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다른 처방을 내릴 것도 없고, 단지 통증 완화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단다. 할 말을 잃었다. 암담하여 뭐라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내는 가슴이 무너졌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호스피스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인은 환자에게 암임을 밝히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 한다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가 없는 틈을 타 암이라고 말씀 드렸다.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위 덕분에 행복했노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아마 암인 줄 짐작하셨던 모양이다. 오히려 편안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사위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2주 동안 힘겨운 암과의 투쟁을 하시고 『시편 23편』을 들으시면서 편안히 주무시듯이 영혼은 떠나셨다.

이제 8월 15일이면 장모님께서 천국에 가신지 꼭 100일이 되는 날이다. 그 분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를 한다. 그리움 너머로 햇살이 돋으면 샤워를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평생 희생과 봉사의 삶을 마무리 하시고 평안히 영생하시길 소망한다.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육신의 고통이 없는 곳에서 안식하시길 기도한다. 지금도 퇴근 후 문을 열고 들어오면 당신 방에서 “왔어?”하고 인사하시는 모습이 보인다. 멋은 없지만 정이 넘치는 이 시대의 정형적인 할머니의 모습이다. 단 물이 줄줄 흐르는 조치원 복숭아를 유난히 좋아하시던 장모님! 복숭아 철이 되니 가슴이 시리도록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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