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눈] 무장 해제한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지난해 개봉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영화 <곡성>에 나온 아역 배우의 극중 대사가 큰 화제였다. 지금도 유행어처럼 간간이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뭣이 중헌디”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보면 이 말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요즘이다. 새해 첫날 박근혜 대통령이 느닷없이 간담회를 하겠다면서 기자들을 불렀다. 그것도 풀(POOL)기자단이라고 불리는 상주기자들에만 연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느닷없는 간담회 무장해제 뒤 순순히 불려간 기자들
이들도 간담회 20분 전에야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풀 기자단에 속한 지방지 기자들은 알고도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자실이 있는 춘추관에 머물고 있던 기자들만 참석했을 성 싶다. 아니면 청와대가 ‘입맛’에 맞는 기자들에게만 미리 귀띔을 해 줬을 수도 있다.
출입처에서 가장 고위급 취재대상이 연 간담회에 기자가 참석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노트북과 카메라 대신 수첩만 가져오라는 청와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데는 같은 출입기자로서 납득이 안 간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번의 담화 내내 자기말만 하는데도 질문조차 하지 않으면서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한순간에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됐다. 박근혜 정부의 부역자란 비판도 들었다.
그럼에도 국회 탄핵 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박 대통령이 새해 첫날 ‘급조된 간담회’에 스스로 무장을 해제했다. 그리고 40여분 간 여전히 궤변 섞인 대통령의 억울함을 ‘친절히’ 경청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감시하는 최고 기자들 맞나
기자들에게 있어 청와대 춘추관은 한번쯤 출입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며 취재할 수 있고, 국가 정책이 최종 결정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언론사는 내로라하는 자사 기자들을 청와대에 출입시킨다.
국민들이 여느 기자들보다 청와대 출입 기자에게 보다 깊은 정의감과 소명의식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민을 대신해 국가 최고 권력자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공인이기에 평범한 직장인과는 엄연히 다른 직업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이들의 행태를 보면 같은 출입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언제까지 국민들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자신의 변명만 늘어놓는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어줄 건가.
국민 바보로 아는 건 대통령 하나로 족하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현지에서 취재 중이던 jtbc 이가혁 기자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이 기자의 열정과 노력에 같은 기자로서 박수 쳐주고 싶다. 국민들이 기자들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작년 연말 나는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대국민담화 직후 질문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에 ‘참회록’을 썼다. 2016년 마지막 날은 광화문 광장에서 국민들과 촛불을 들었다. 기자로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몇 번 더 기자들과 만난다고 한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박 대통령의 간담회 요청을 거부하기 바란다.
국민을 우롱하고 바보로 만드는 것은 대통령 한 사람으로 족하다. 국론을 분열하고 국민 갈등을 조장하는 기사라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낫다. 무엇이 중요한지부터 심각히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기사를 쓸 거면 기자하지 말자. 기자 명함만 들고 다닌다고 다 같은 기자가 아니다. 기자실에만 처박혀있지 말고 저 광장에 나가 국민들 외침도 들어보라. 지금은 그것이 더 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