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영국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인조인간 ‘렉스’가 공개됐다. 전 세계의 연구실에서 각각 생체공학 기관을 제공했고, 영국기업이 조립을 맡았다. 렉스를 만드는데 총 100만 달러가 투입됐다. 이 인조로봇은 뇌나 소화기관은 없지만 신장 2m에 인공 팔과 다리를 달고 있으며 느리게 걸을 수 있다. 눈에는 ‘아거스Ⅱ’ 인공 망막, 귀에는 코클리어 사의 인공 와우, 심장은 신카디아 시스템 사의 심실 보조장치를 장착해 인공 피를 전신으로 보냈다. 또 인공 췌장은 혈당치를 정해 인슐린을 분비하며, 인공 폐와 인공 신장을 달고 있다. 간
‘600만 불의 사나이.’ 1980년대 크게 성공한 TV연속물이다. ‘600만 불의 사나이’는 당시의 과학이나 사회적 여건상 현실화될 수 없는 공상극이다. 극중 우주비행사이자 공군 파일럿인 스티븐 오스틴 대령은 사고로 잃은 왼쪽 눈, 오른팔과 두 다리를 600만 불이라는 거액을 들여 당시에는 불가능했던 최첨단 생체공학 구조물로 대체했다.200배의 줌(zoom) 기능과 열 감지가 가능한 눈, 6배나 힘이 센 로봇 팔, 시속 100㎞로 달릴 수 있고 높은 장애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로봇다리를 장착한 인류 최초의 생체공학 인간으로 재탄
인간은 길어야 100년을 산다. 게다가 마지막 10여 년은 대부분 질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어떤 이는 무척 짧게 살지만 어떤 이는 100세 이상을 건강하게 산다. 짧든 길든 생로병사는 인간의 숙명이다. 삶의 기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성공적인 인생을 즐기다가 후회 없이 삶을 마감하는 것은 큰 행복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매사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의미가 새삼 마음에 와 닿는 이유다.의외로
고대의학을 소재로 한 명화나 삽화에서 여성의 누드화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400-500년의 히포크라테스 시절은 물론 1500년대의 중세 유럽을 거치는 동안 그림 속 주제로 여성의 누드를 그릴 만한 용기 있는 화가는 없었다. 게다가 여성의 누드를 그리는 것이 철저히 억압됐던 시대여서 일반 누드는 물론 의학을 주제로 한 누드화는 더욱 희소할 수밖에 없었다.여성의 누드화는 유럽 왕정시대에야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다. 옷을 입은 남녀 모델보다는 옷을 벗고 육체의 일부가 노출되는 그림이나 조각들이 유행했다. 그래도 이 시대
고대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전통은 자랑할 만하다. 삼국시대의 역사 중 고구려에는 유기(遺記)가, 백제에는 고흥의 서기(書記)가, 신라에는 거칠부의 국사(國史)와 최치원의 통일신라 기록서가, 고려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때는 왕의 일기인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 왜구 침략에 대한 국방 기록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조선왕조실록(實錄) 등이 있었다. 권수로는 중국의 대명(大明)실록이나 청(靑)실록에 견줄만한 세계 최고 수준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였다.다만 이중에서 백성들의 역병, 질병, 전쟁으
서양에서는 2000여 년 전 히포크라테스라는 걸출한 의사가 나타나 의료의 기본 이념을 빠르게 확립했던 반면,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설 등 자연치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이후 1000년간 동서양 의학의 위상은 정반대 양상이었다. 서양은 중세 암흑시대에 접어들면서 종교적 맹신에 빠져 의료 발전의 정체기를 맞이했다. 반면, 동양은 서양보다 1000여년 앞서 중국과 티베트에서 약초, 한약, 침, 뜸 등 자연적 접근에 따른 의료 기술을 발달시켰다.그러나 1500년경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는 현대적 의학을 발전시킨 반면, 동양은 19
의과대학이라고 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대학은 800년대 후반 설립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의과대학(Schola Medica Salernitana)이다. 이후 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볼로냐, 프랑스의 몽펠리에와 파리에 의과대학이 설립됐다.그중에서도 의학의 선두주자는 몽펠리에 의과대학(Faculté de medicine de Montpellier)으로, 1829년에 교황 니콜라오 4세의 공식 승인을 받았고 매해 의사당 1구씩의 시체 해부를 허락받았다.의학사를 보면 중세시대에 시작된 현대의학을 위한 발걸음은 여러 유럽국가들 중에서도 이탈리아
중세시대의 교과서나 삽화에는 질병이나 환자가 악마나 괴물로 묘사돼 있다. 과거부터 질병은 신의 저주로 사람의 몸에 악마가 깃든 것이고, 암이나 종양은 악마의 장난 산물로 생각해왔기 때문인 듯싶다.같은 관점에서 의사는 이러한 병을 막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즉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의 몸에 깃들어 환자의 몸을 잠식한 불가사의한 악마와 싸우는 ‘퇴마사’였다.14세기 체코의 사본인 에서도 흑사병은 악마로 묘사돼 있다. 그림 1에서 환자는 자신의 목을 조르
유럽과 서양에서는 2000여 년 전 히포크라테스라는 걸출한 의사가 나타나 의료의 기초 이론을 확립했다. 동서양 의학사가 다른 길을 걸은 이유다. 같은 기간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설 등 실증적이지 않은 자연 치유만을 주장했다.그러나 이후 1000년가량 동서양 의학사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서양은 중세 암흑시대에 접어들면서 종교적 맹신에 빠졌다. 반면 동양은 인도, 중국, 티베트 의료의 성장으로 의료의 자연적 접근에 따른 침, 뜸 등의 기술을 발달시켰다.다시 1500년경부터 서양의 의료는 눈부신 발달을 거듭해 오늘날의 현대 의료 수준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아이가 깊고 편안하고 행복한 잠에 빠져있다. 어머니의 가슴 옷이 조금 열린 것으로 보아 아이가 좀 전까지 엄마의 젖을 빨았나보다.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아이의 사랑에 취한 표정이다. 잠든 아이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따스한 손길로 아이를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1은 근 200년 전의 작품이다. 작가는 앨버트 사우스워스(Albert S. Southworth)와 조시아 호스(Josiah J. Hawes)다. 세상의 어느 그림도 이들 모자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을 담을 수 없을 것이다.화가 노만 록웰(Norm
예전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집단요양소에서 강제수용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정신 이상자의 발작과 이상행동이 사회 분위기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탓이다.그러던 중 의사 호가스가 정신이상자들이 사회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들렘 정신병원에서 1735명의 환자를 분석한 바 있다.이에 동조한 18세기 후반 에든버러의 윌리엄 쿨렌(1710-1790)은 정신병이 신경계통의 이상 질병이며 약물치료가 가능하다고 천명했다.이어 파리 비세틀 병원의 정신과 의사였던 필립 피넬(1745-1826)은 신경계통 질환을 앓고 있는 정신병 환자의
로렌스 스테판 로우리는 1887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시립예술대학 등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는 주로 사람들의 삶, 풍경, 자신과 어머니의 자화상을 평생 동안 300여 점 그렸다. 그 중 일꾼들의 작업장과 병원의 외래병동 등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많이 그려 명성을 얻었다.그림은 1950년대 영국 앙코트 병원이다. 지은 지 1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옛날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외래 전용 복도 대기실 모습이다.환자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뒤에 보이는 5개의 외래 진찰실에서 이름을 호명하면 의사를 만나게 된다. 대기 중인
존 레이버리 경(Sir John Lavery, 1856-1941)은 영국 글래스고 예술학교와 파리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글래스고 보이즈(Glasgow Boys)’라는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활동했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 기념 및 수차례의 국제 미술 전시회에서 섬세한 전쟁 그림 묘사로 유명해졌다. 1918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는 영예를 얻었다.그림1은 1914년의 런던병원이다. 군 부상병들의 입원 병동을 묘사했다.강당같이 크고 넓은 병실에 병상이 셀 수 없이 많다. 침대 위에는 현재에도 일부 병실에서 사용되는, 환자의 머리와 상체만을
‘피에로의 아픔’을 그린 프랑스 화가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 그는 파리에서 구루아 들라로슈에게 그림을 배웠다.실력은 있었지만 당시 최고의 예술 대회였던 로마 대상에 6번 출전해 겨우 한 번 2등상을 탔을 뿐이다. 그는 이 때문에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상류계급을 추종하면서도 신분상승이 어려웠던 그는 그들의 생활과 사회생활에 전반적으로 저항적이고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그림1에서도 아픈 여성을 위해 왕진하러 온 거만스레 보이는 의사는 치료를 잘 못할 뿐만 아니라 병 상태도 잘 모르는 것처럼
세계 최초의 의과대학은 80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설립됐다. 이후 이탈리아 파도바와 볼로냐, 1289년 프랑스 몽펠리에와 파리에 잇따라 의과대학이 들어섰다.그중에서도 의학의 선두주자는 몽펠리에 의대다. 1289년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공식 승인을 받았고, 매해 의사 한 명당 한 구씩의 시체 해부를 허락받았다.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중세시대 의학의 시발점은 단연 이탈리아다. 볼로냐 의대 등에는 500~600년 전 학문적으로 유명했던 의학 선구자들의 흉상이 몇 백 년 된 고색창연한 교정과 복도 곳곳에 즐비하다.그들의
그림 1은 1891년 뉴욕 의과대학 소강의실의 토론식 수업 모습이다. 한 의사가 어린 환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아이의 증상, 진단과 치료 등에 대해 동료 교수와 의대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토론도 이뤄졌다.뒤에는 또 다른 엄마와 아이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토론자 중에는 여성 의사가 네 명이나 앉아 있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여성은 의학을 공부할 수 없었으나 1850년 필라델피아 여자 의과대학을 필두로 1865년 뉴욕 여자 의대, 1874년 영국 런던 여자 의대가 설립됐다.그림2는 1904년 파리 의대 소아과 임상강의 모습이다
18-19세기 영국 의사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거나 부유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환자를 잘 치료하지도 못하면서 과다한 진료비만 요구한다며 조롱거리나 웃음의 소재로 삼곤 했다.그림1은 아픔을 호소하는 부유한 환자 곁에서 탐욕스러운 모습의 의사 다섯 명이 포위하듯 둘러선 모습이다. 의사들은 환자의 진료와 투여할 약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비싼 진찰료와 효과도 없는 약값을 청구하면서 환자의 상태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옆의 의자에는 또 다른 다섯 명의 의사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의사들 모두 당대의 의사를 상징하는 지
그림1은 신화적 의미가 강한 그리스 시대 최초의 위대한 의사인 아스클레피오스(B.C 700년경)가 여성을 진찰하는 모습이다.의학적 진찰의 의미보다는 1880년대 당시 화가 에드워드 포인터(1836-1919)가 누드화를 그린다는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위대한 의사의 진찰 장면으로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여성들이 모두 병색(病色)이 없는데다 키가 크고 날렵한 누드 상태다. 더구나 진찰 모습과는 다른 갖가지 유연한 몸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각상같이 보이려는 듯 여성들의 피부를 희게 칠했다. 여인의 살색이라기보다는 흡사 석고상
옥스포드 사전을 보면 ‘쾍 닥터’(Quack Doctor, 돌팔이 의사)라는 말이 있는데, 의학 기술과 치료에 대해 깊이는 없으면서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떠돌이 의사나 약사를 칭한다고 한다. 그림1은 1600년대 돌팔이 의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번잡한 시장에 높은 단상을 만들어 놓은 뒤 원숭이 한 마리를 데리고 있고, 위엄 있게 보이느라 대학교수 가운을 걸치고 있다. 중국식 우산을 펼쳐놓고는 그 아래서 자신이 만든 접시에 담긴 약을 팔기 위해 큰 소리로 선전을 하고 있다. 빵을 파는 여자아이들과 잡상인들이 모여 있고,
북미와 북아시아의 인디언 주술사(Wizard or Shamans)들은 질병이 초자연적인 일이거나 악마들이 개입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물의 머리 가죽을 쓰고 환상적인 춤을 추면서 주문을 외웠다. 그림1에서는 인디언 주술사가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환자의 쾌유를 손에 쥔 방울을 흔들며 빌고 있는 모습이다. 주술사들은 출산, 풍성한 곡식, 사냥 전리품 등을 기원하며 그 종족의 치유자 혹은 종교적 대표자로 활동해왔다.그림2에선 우리가 흔히 무당(Shamans)이나 마녀(Witch Doctor)라고 부르는 아프리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