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만물은 고유의 파장을 가진다. 소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리에는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오성이 있다. 오성은 오행에 배속된다.『사기』,「악서」에 “궁(宮)은 비장을 움직여 성심(聖心)을 조화롭고 바르게 만들며, 상(商)은 폐를 움직여 의(義)를 조화롭고 바르게 만들며, 각(角)은 간(肝)을 움직여 인(仁)을 조화롭고 바르게 만들며, 치(徵)는 심장을 움직여 예(禮)를 조화롭고 바르게 만들며, 우(羽)는 신장을 움직여 지(智)를 조화롭고 바르게 만든다.”라 하여 오성과 오덕을 상응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맞추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조건은 음령오행과 수리와 파동이다. 그 중 음양오행에 대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동양에서는 세상의 만사만물을 이루는 요소를 음양과 오행으로 분류한다. 만사만물은 다양한 에너지가 모여 이루어진다. 음양오행설에서는 에너지의 종류를 음과 양, 그리고 수, 화, 목, 금, 토로 나눈다. 음과 양, 그리고 오행이 어떻게 배합되었는가에 따라 만물의 형태는 물론, 성질도 달라진다. 음양은 에너지의 방향성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상하(上下)로 볼 때, 에너지가 위로 가면 양
만물은 모두 이름을 가진다. 이름은 인간이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한 사회적 산물이다. 물론, 이름이 그 사물의 실체는 아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장자(莊子)는 “이름은 실체의 객이다.[名者 實之賓也]”라 하였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이름이 없으면 사물을 효과적으로 지칭할 수 없다. 그래서 이름은 어쩔 수 없이 지을 수밖에 없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름’을 뜻하는 ‘명(名)’자에 대해 해석한 말이 보인다. 거기서는 ‘저녁’을 뜻하는 ‘석(夕)’자와 ‘입’을 뜻하는 ‘구(口)’자가 결합하여 ‘名’자가 나왔다고
이름과 운명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성명학’이라 한다. 성명학은 미신적인 학문인가, 근거가 있는 학문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 한다. 필자가 볼 때, 성명학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좋은 에너지를 가지면 좋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좋은 에너지를 가진 이름을 가지면 반드시 운명이 개선된다. 이름은 운명의 부호이다. 이름 속에 음양오행의 기운이 담겨있다. 이름 속에 담긴 기운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름이 운명을 만드는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타고난 운명대로 이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난 정치인 홍준표(洪準杓)전 경남지사는 1954년 12월 5일에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너무 빈한하여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창녕에서 태어나 합천으로 이사를 했고, 합천에서 다시 대구로 이사를 하였다. 대구에 와서는 영남중학교와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가담하면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였다. 사법시험에 낙방한 어느 겨울밤 울산 현대조선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아버지가 해변 모래밭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추위를 견디는 모습을 보았다. 이
다양한 이력을 가진 정치인 안철수(安哲秀)는 1962년 2월 26일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안영모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1980년에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였다. 의대 3년차부터는 컴퓨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88년에 세계 최초로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약 7년간 환자를 치료하는 일과 컴퓨터 프로그램 일을 함께 하다가 결국 의사의 길을 접고 1995년에 안철수연구소를 세웠다. 이후 미국에 가서 벤처 비즈니스 과정과 MBA 과정을 밟은 후 2008년
정치인 문재인(文在寅)은 1953년에 경남 거제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 솔안마을 출신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흥남철수 작전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하여 거제도에 정착하였으나, 가족의 생업과 교육 문제 때문에 결국 부산 영도로 이사하였다. 문재인은 경남중과 경남고를 나와 경희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경희대 재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열중하였다. 전두환 정권 때는 투옥된 상태에서 제22회 사법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판검사에 임용되지 못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과 합
화산 같은 정열의 대통령 노무현(盧武鉉)은 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막노동판에서 일하다가 독학으로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에서 1년간 판사로 재직하다가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3대 국회 때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3당 합당에 반대하여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총선에서 계속 낙선하다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16대 대선에는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 주자로 나가 이회창 후보에게 역전승을 하였다. 대통령에 취임
대쪽판사 이회창(李會昌)은 청렴과 기개로 이름난 대한민국 대표적인 법조인이다. 그는 1935년 6월 2일 황해도 서흥에서 이홍규(李弘圭)와 김사순(金四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및 선대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다.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인 1957년에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1960년에 법관으로 임용되었다. 군사정권 때는 정부의 요청보다는 자신의 법적 소신을 더 중시하므로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6년 4월에 대법관에서 물러났으나 노태우 정부 때 잠시 복직했다가 퇴
풍운 속의 정치인 김종필(金鍾泌)은 한국 현대사의 곳곳에 이름이 올라있다. 그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 사범대를 2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8년에 제8기로 졸업하였다. 1958년에는 육본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61년 5·16 때는 박정희를 도와 군사정권의 탄생에 앞장섰다. 이후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을 거치면서, 1971년에는 공화당 부총재에 올랐다가 다시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후 제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그는 신군부에게 핍박을 받다가 1987년에 공화당을 재건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대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발자취는 한국의 현대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의 호적상 출생일은 음력 1925년 12월 3일이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파란만장한 정치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1년에는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경합을 벌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투옥과 감금을 되풀이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주도하였다. 1987년
사주팔자란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기둥(四柱)과 간지 여덟글자(八字)를 뜻한다. 태어난 연도 하나만으로 한 해 운세를 점치는 것은 정확성이 그다지 높지는 않다. 또 그 해 운세가 좋다고 해도 개인이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좋은 운을 받을 수 없다. 반대로 비록 운세가 좋지 않더라도 매사 자중하면 화를 면할 수 있다.중화서당 김기 원장(철학박사)이 풀어낸 2017년 정유년 띠별 신년운세다. ▣ 쥐띠▲96년생(병자)힘겨루기를 할 인물을 만난다.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활동량이 많아지고 막혔던 일이 소통된다.▲84년생(갑자)나에게 힘
정유년(丁酉年) ‘붉은 닭의 해’ 많은 파란을 일으켰던 병신년(丙申年)은 어느 사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제 새해가 밝아왔다. 2017년은 간지로 볼 때, 정유년이다. 정유년의 ‘정(丁)’은 불을 말하는데, 불은 붉은 색조를 가진다. ‘유(酉)’는 닭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유년은 ‘붉은 닭의 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은 붉은 색이다. 붉은 색은 예로부터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신성함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을 경우에는 붉은 색을 중시한다. 새해에는 붉은 색조를 가진 불의 에너지가 혼탁한 이 세상을 제대로 정
한국 민주주의의 큰 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경남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장택상(張澤相) 총리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제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을 기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9선 의원의 경력을 남겼다.한국현대사는 ‘경제입국’과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의원제명, 가택연금, 단식농성
현대기아자동차 정몽구(鄭夢九) 회장은 1938년 03월 19일에 정주영 회장의 차남으로 강원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경복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 이후 현대자동차서비스, 현대정공 등의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근무하였다. 현대정공에 있을 때부터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1973년에 현대자동차 이사, 1986년 인천제철 대표이사를 거쳐 2003년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의욕적이고 과감한 경영 스타일은 현대자동차의 사세를 획기적으로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전자산업으로 세계를 제패한 한국재계의 거물이다. 1942년 1월 9일에 경남 의령에서 이병철 회장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산사범 부속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선진문물을 익히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어린 이건희는 고독, 민족차별, 소외, 고민, 그리움 등 어른들이 느끼는 심리적 고통을 맛보며 살았다. 3년의 일본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마쳤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
한진그룹 조중훈(趙重勳) 회장은 이 나라 운송업계의 독보적 존재다. 그는 1920년 2월 11일에 인천시 항동에서 직물 도매업을 하던 조명희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성급하고 행동력이 강하며 두뇌회전이 빨랐다. 그는 휘문고보에 입학한 후 곧바로 자퇴서를 내고 경남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에 입학 후 2년 만에 졸업했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가서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따고 실무 경험을 쌓은 이후 고향에다 자동차 엔진 수리공장인 이연공업사를 차렸다. 사업은 발전해 나갔으나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이연공업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완벽히 실천한 유한양행의 유일한(柳一韓) 회장. 그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이자 독립 운동가이면서 교육 사업가였다. 1895년 1월 15일에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평양 땅 유기연(柳基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부터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미국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된 그는 노동을 통하여 건전한 생활태도를 익히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이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세운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를 다녔다. 그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미시간대학교와 대학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
껌으로 시작하여 재벌 반열에 오른 사업가 신격호(辛格浩) 회장. 그는 롯데그룹의 창업주로 1922년 11월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남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기인 1940년에 부산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44년에 일본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서 갖가지 일을 하다가 마침내 껌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만든 풍선껌은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 그러다가 1948년 본격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 일본에서 ‘주식회사 롯
풍운의 사업가 김우중(金宇中) 전 회장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0년 간 한국 경제의 외연확장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그는 고생스런 초반을 보냈으며 중년기에는 세계를 누비는 대 사업가가 되었고, 말년에는 떠도는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철저히 본 인물이다. 아마 삶에 대한 느낌이 남보다 많으리라. 그는 193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되어 15세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소년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살았다. 휴전이 되자 서울로 와서 경기중학교와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