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120>

어제 공개된 교육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은 우려했던 대로 보수·진보할 것 없이 양측의 반발이 거세다. 친일·독재 미화내용 금지와 국민·교육계 여론 충분히 반영, 다양한 집필진 구성 등을 내세워 조건부 찬성하던 보수성향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검토본을 본 뒤 '수용불가'로 돌아섰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내일부터 '연가투쟁'을 시작으로 불복종운동에 나선다.

임연희 교육문화부장
교육부만 '올바른 역사교과서' 교육현장에서는 폐기 촉구

교육부만 '올바른 역사교과서'로서 균형 있게 서술했다고 자화자찬할 뿐 교육현장에서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하는 등 거부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검토본이 공개 되자마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상당히 축소됐다"며 “광주에서의 집회 사진이 서울역(시위) 사진으로 바뀌고 군인들의 탄압장면이 빠졌다”고 반발했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도 장 교육감은 "광주학생에 대한 신군부의 강력한 탄압이 있었기 때문에 시민이 분개해 일어났다"가 "광주에서 강력한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군부에서 강력히 진압해 많은 희생이 있었다"로 변했음을 지적하며 전면 폐기를 주장했다. 광주·세종·강원·전북교육청은 공동으로 보조교재를 개발하고 있으며 서울시교육청도 역사교재 개발에 착수했다. 

물론 찬성 쪽도 있다. 대구교육감과 울산교육감은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는 역사교과서가 필요하다"며 "교육부 지침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을 제외한 전국 14개 시·도교육감은 지난 주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중단 및 폐기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으며 진보 교육감들은 국정 교과서가 발행되더라도 현장에서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진보는 진보대로 목청을 돋우고 보수 쪽 교육감들도 나름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설동호 대전교육감 국정 역사교과서 수용여부 제대로 못 밝혀

이런 가운데 설동호 대전시교육감은 가타부타 의견을 내놓길 주저한다. '국정 역사교과서 거부를 선언하라'는 전교조의 요구에도 답하지 않고 국정 교과서 수용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의 의견에 따르겠다", "정책 추진과정을 지켜본 뒤 결정하겠다"는 식의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어제 현장검토본이 나온 뒤 각 지역 교육감들이 수용여부와 대안을 공개할 때 설 교육감의 의견은 어정쩡했다.

시·도교육감협의회 결정대로라면 수용거부인데 교육부 발표 후 자체적으로 채택여부 협의를 거친 후 결정하겠다는 것은 서로 배치돼 대전교육청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당장 내년 3월이면 중·고등학교에 국정 역사교과서가 배포될지 모르는데 설 교육감은 대전 학생들에게 이 교재를 가르칠지 말지의 결정을 타 시·도교육감과 교육부에 맡기겠다는 것인가?

치열한 싸움이 될 국정 교과서 문제를 '이기는 편 우리 편'식으로 눈치만 보다가 대세에 묻어가겠다는 태도는 더 나쁘다. 설 교육감과 대전교육청은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면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교육부가 공개한 현장검토본을 면밀히 검토하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대전교육청은 문제를 찾아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옆 동네와 상급기관의 결정만 기다리면서 어떻게 우리 학생들에게는 창의와 협업을 가르치는지 답답하다. 

설 교육감과 대전교육청의 우유부단함은 비단 국정 교과서 뿐이 아니었다. 진보 교육감들이 9시 등교를 시행할 때 설 교육감은 "학교장이 결정할 일"이라고 미뤘고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문제에서도 진보교육감들과 "누리과정 예산을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하더니 자체 예산을 세웠다. 후보시절 학생인권조례 제정 의지를 보였지만 당선 후 '교권 침해'를 이유로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는 28일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했지만 보수·진보할 것 없이 양측의 반발이 거세다.
대통령 탄핵 돌풍 속에 국정 역사교과서 탄핵될 수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데다 전국적으로 하야 요구가 거센 상황에서 교육부가 '박정희 위인전',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효도교과서'로 비판받는 국정 교과서를 강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대통령 탄핵 돌풍 속에 국정 역사교과서도 탄핵될지 모른다. 교육부도 겉으로는 강행을 말하지만 적용시점을 미루거나 시범학교 도입, 국·검정 혼용 등 다양한 출구전략을 고민하고 있다.

설 교육감은 더 이상 좌고우면(左顧右眄)할 이유가 없다. 다음달 23일까지 교육부의 의견수렴 결과를 지켜본다는 식의 유보적 대답 대신 적극적으로 지역의 역사 교사들에게 의견을 묻고 검토해 대전교육청의 정책방향을 세워야 한다. 그의 말대로 교육에는 진보와 보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 우리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지, 어떻게 하면 교육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할지만 고민하면 된다. 설 교육감은 자신의 교육철학과 의견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