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박사의 그림으로 만나는 천년 의학여행] <19>고대의 산부인과

이승구 선병원재단 국제의료원장 겸 정형외과 과장.
중세시대에 아기를 출산하는 일은 여성들의 특권이어서 남성은 이 영역에 끼어들지 못했다. 분만실에 남자가 들어가는 것은 금지됐고 분만은 전적으로 산파들의 일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산파와 점성술가의 손에 달린 출산 장면으로, 별의 위치에 따라 아기의 운명과 출산 시간 등이 결정됐다.

산부인과학은 르네상스 이후 발달하기 시작했다.

산파들을 위한 최초의 입문서는 1513년 유카리스 로잘린이 쓴 ‘임산부와 생명의 땅을 위한 장미정원’이다.

태아의 위치가 거꾸로 들어섰을 때 발을 돌리는 고대 산모들의 운동방법들을 기술하고 있다.

산파와 점성술사 그리고 출산(1554년 야곱 루에피의 교과서 삽입.

반면 어설픈 내용도 많아, 산도(産道)를 직접 문지르거나 산모에게 탕약을 먹여 매끄럽게 해야 하며 난산일 때 산모에게 후추 냄새를 맡게 하면 출산이 촉진되고, 재채기를 하면 자궁이 수축된다거나 기형아는 산모가 악마와 교제한 결과라고 했다.

여성과 산모에게 모두 불리한 내용들이었고 당시에는 모두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2500년경 히말라야 산맥의 카필라바스투 성에서 하얀 코끼리로 변신한 신(神)이 마야 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 싯다르타(부처)를 잉태하고 후에 오른쪽 옆구리로 고통과 고뇌 없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최초의 제왕절개술이었다.

로마 초기의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BC 715-673)는 임신한 여성이 사망하면 여성의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다.

로마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제왕절개(Cesarian section)의 이름이 유래됐다고는 하나 의심스럽다.

카이사르가 복벽절개에 의해 태어났다는 데에서 명칭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다.

제왕절개술의 개혁가는 1540년 베니스의 스키피오 메르쿠니다.

그는 자궁협착과 임산부의 사체 해부를 연구했다.

최초로 상세히 묘사된 복부의 개복수술은 1549년 비엔나의 외과의사들이 그림에서와 같이 4년째 자궁 외 임신을 한 여성을 마취제도 없이 수술하는 데 성공한 산부인과 수술이었다.

세계 최초의 무(無) 마취 자궁외 임신의 수술(1549년 비엔나, 교과서 삽화).

이후 몇 백 년이나 제왕절개술이 시도됐으나 산모가 자주 사망하다가, 1805년에 이르러 독일인 산부인과 의사 프리드리히 오지안더, 1828년 영국인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블런델, 이탈리아의 에두아르도 폴로(1842-1902)를 거쳐 마침내 1869년 보스톤의 호라티오 스로어러가 정식 마취를 통해 현재의 제왕절개술과 같은 개복수술에 성공했다.

통증 완화를 위한 마취가 전혀 없던 옛 시절은 산모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시절들이었다.

현대의 산모들은 행복하기 그지없다.

1570년경 영국의 윌리엄 체임벌린은 분만용 겸자를 고안해 사용했다.

1784년 영국 에딘버러의 산부인과 의사 존 에이킨은 바깥의 공기가 분만이나 제왕절개술시 복부장기에 해롭다고 생각해 복강에 공기가 닿지 않도록 욕조 안 물속에서 분만을 시행했다.

현대에서도 일부 시행되고 있는 물속 욕조분만의 시초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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