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125>

지난 2000년 오연호 씨가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오마이뉴스>를 창간하며 뉴스생산은 더 이상 전업기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뉴스게릴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시민기자들은 광화문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는가 하면 출입기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자실에서 쫓겨나자 화투짝이 굴러다니고 술 먹고 낮잠 자던 폐쇄적인 기자실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임연희 교육문화부장
이는 주류 언론의 텃세와 편견에 맞선 시민의 힘에서 나온 언론혁명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유일하게 <오마이뉴스>와 단독 인터뷰를 했을 정도다. 직업기자들이 기자실에서 편하게 기사를 쓸 때 시민기자들은 PC방 등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노트북을 꺼내 기사를 송고했다. 오연호 씨의 책 제목처럼 시민기자는 대한민국의 특산품이었다.

스마트 폰 보급되며 ‘모든 시민은 기자’에서 ‘모든 시민은 미디어’로

2009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스마트 폰이 상륙하며 '모든 시민은 기자'를 넘어 ‘모든 시민이 미디어’를 갖게 되었다. 트위터와 페이스 북,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세계 곳곳의 일을 실시간으로 알고 재난과 사고현장 사진을 기자보다 먼저 찍어 SNS에 공유한다.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가기보다 SNS에서 관련 사진을 찾는 게 빠를 때도 있다. 전 국민이 미디어를 하나씩 들고 다니니 뉴스의 생명인 속보성이 퇴색하고 특종 개념도 모호해졌다.

특히나 스마트 폰에는 음성녹음 기능이 탑재돼 있어 통화 중 녹음은 물론 타인 간의 대화를 녹취할 수 있고 사진과 영상까지 수시로 촬영이 가능하다. 기자나 정보·사법기관 종사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녹취가 일반인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이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폰에서 나온 200여개의 녹음파일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중대한 증거가 되고 있다.

녹취 애플리케이션의 다운로드가 수천 건을 넘어섰고 모든 통화를 자동녹음하거나 미리 지정한 번호로 걸려온 통화만 선별 녹음할 수도 있다. 첩보영화에서 보던 만년필, 목걸이, 시계를 활용한 녹음기를 찾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갈등이 생겼을 경우 만나 대화와 타협으로 풀던 과거와 달리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녹취가 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 대통령 기자들과 만남에서 스마트 폰 녹음·노트북 속기 금지

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신년인사회를 가진 박근혜 대통령은 스마트 폰 녹음과 노트북 속기를 금지했다. 사진기자들도 참석했지만 촬영을 못하게 한 채 전속 사진사가 촬영한 6장의 사진을 언론에 배포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며 모든 것이 오해와 왜곡, 허위와 과장이라고 했지만 언론에 공개된 대형 얼굴사진과 비서관과의 통화내용 등 사진과 녹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 대전시의회에서도 의장과 동 주민자치위원장 간 욕설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돼 파장이 일었다. 중구의 한 주민자치위원장이 "김경훈 의장에게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을 당했다"며 기자실을 찾아와 녹취록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김 의장이 전화로 주민자치위원장에게 한 욕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통화의 일부여서 김 의장이 왜 흥분했으며 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명에 나선 김 의장은 "동장에 대한 감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이 있었다"며 위원장과의 통화를 공개했다. 주민자치위원장만 통화녹음을 한 게 아니라 김 의장도 함께 녹음을 한 셈이다. 김 의장의 욕설을 폭로하러 왔던 주민자치위원장은 김 의장이 부정청탁으로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냥 돌아갔지만 이 사람보다 공인으로서 김 의장이 입은 손해가 더 크다.

상대가 거친 말로 청탁을 했더라도 시민을 대표하는 시의회 의장으로서 김 의장은 자중했어야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주민에게 시의장이 욕설을 퍼부은 것 자체가 옳지 못한 행동이며 정치인 김경훈에게도 마이너스다. 앞으로 김 의장에게 전화하는 민원인이나 기자들은 녹음이 두려워 속 얘기를 못할지도 모른다. 김 의장의 녹취파일 공개로 사건의 맥락은 밝혀졌지만 그에 대한 신뢰는 떨어졌다.

지난 29일 대전시 중구 한 동장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 동의 없이 녹음 유포하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임기 중 처음으로 사임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체포돼 일어났다. 닉슨은 백악관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보좌관과의 대화가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됨으로써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녹음 자체가 위법한 것은 아니다. 본인이 참여하는 통화는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녹음해도 정보통신망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등에 저촉되지 않는다. 하지만 통화내용을 제3자에게 유출하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할 수 있으며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제3자가 동의 없이 녹음해 유포하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다. 꼭 필요한 순간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무턱대고 녹취해 유포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할 때 녹음기를 켜고 녹음하거나 취재수첩에 적을 때보다 빈손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깊고 진지한 이야기가 나온다. 녹음이 기사작성과 증거 확보에 필요하지만 이게 없을 때 더 풍부한 기사가 만들어진다. 사람 간 대화도 마찬가지다. 너도나도 만나면 녹음기부터 켜고 통화내용을 녹취하는 세상은 각박하고 삭막하다. 모든 시민이 기자이며 미디어인 것까진 좋지만 국민 모두가 서로를 감시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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