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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정승열의 세계 속으로] <15>

정승열2017.04.07 10:55:09

▲인스부르크와 인강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유럽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북유럽에는 프랑크족이 세운 국가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는 고대 로마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부터 로마 교황을 구출해주자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샤를마뉴 대제에게 ‘제국 황제’의 관(冠)을 씌워 주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곧 ‘로마제국의 부활’이라 생각되었으나, 프랑크 제국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로 삼분되면서 제국이란 호칭도 소멸되었다.

▲정승열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장

10세기 초 샤를마뉴 대제의 혈통인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750~887)가 단절되고, 오토 1세가 그 뒤를 계승하여 작센 왕조(Saxon dynasty: 919~1024)를 개창했다. 당시 독일의 교회·수도원은 귀족들의 착취로 피폐했는데, 오토 1세는 귀족들의 침략에서 교회를 수호하고 토지를 되찾게 하고, 자제와 가신들을 주교·대수도원장 등 고위성직자로 취임시켜 국왕의 집안과 교회를 결합시켰다.

그러자 962년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신성 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 출현했다. 신성 로마제국이란 고대 로마의 전통보존자인 그리스도 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神聖)이라는 말을 붙였고,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겨서 로마제국이라고 했는데, 이후 역대 독일국왕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지도

오스트리아(Austria)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오토 2세(973~983)가 976년 바이에른 후작의 변경령(邊境領)으로 정하고, 오토 3세(983~1002)의 ‘동쪽의 나라’라는 의미의 ‘Osterriche’라는 이름이 국호의 유래가 되었다. 면적은 약83,855㎢로서 남한(98000㎢)보다 약간 작고 국토의 2/3이 해발 1,500∼3,000m의 알프스산 속에 있고, 인구는 서울시민 숫자보다 적은 870만 명의 나라다(오스트리아 역사는 2017.03.17.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 참조).

▲인스부르크 지도

베네치아를 출발한 버스는 알프스 산맥의 브레너 고개를 넘어 오스트리아로 들어선 후에도  고속도로와 국도를 번갈아 쉬지 않고 달리더니, 5시간 만에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에 도착했다. 해발 574m의 알프스 계곡에 있는 인스부르크는 '인 강(Inn)에 놓인 다리(Bruck)'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지형상 오스트리아에서 서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탓에 남․북으로 이탈리아․독일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오히려 수도 비엔나와는 거리가 멀어서 국제적인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인구 약13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 인스부르크는 현재 티롤(Tirol) 주정부의 소재지이지만, 수도 비엔나, 그라츠(Graz), 린츠(Linz), 찰츠브르크(Salzburg)에 이은 5대 도시로서 13세기 이래 19세기 초까지 약600년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신성 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으로서 곳곳에 그 유적이 많은 고대도시다.

그런데, 근래에는 알프스 중턱에 위치하여 항상 기온이 선선할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샤를리제, 북쪽으로 노르트케테(2,334m) 등 알프스는 일 년 내내 만년설이 쌓여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1964년과 1976년 두 차례나 동계 올림픽을 치른 스포츠 도시로 변모했다. 이후 인스부르크는 한 여름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어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스키어와 패러글라이더들이 찾아오지만, 워낙 작은 도시여서 항공기 직항노선이 없어서 대부분 독일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공항 등을 거치거나  잘 발달된 열차로 독일의 뮌헨(200㎞),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180㎞), 이탈리아 밀라노 등지에서 찾아온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산악인들과 여행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아서 관광수입만으로도 주정부 재정이 넉넉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작은 도시에서 두 번이나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다는 사실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치르게 될 우리가 한번쯤 찾아가서 그 노하우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인스브루크는 워낙 좁은 산간 도시여서 기차역에서 중심지까지 도보로 10분 안팎이지만, 2~ 3일을 체류하려고 한다면 ‘인스부르크 투어패스’로 트램 등 대중교통은 물론 케이블카․ 등산열차 등을 무제한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패스는 1일권 19유로, 2일권 34유로, 3일권은 39유로 등 다양하며, 박물관 입장도 가능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인스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재위 1740~1780)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라고 하는데, 기차역에서 구시가지까지 쭉 뻗은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에는 1706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 군을 격퇴한 기념하여 세운 안나 기념탑(St. Anna's Column)이 있다. 안나(1738~1789)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둘째 공주로서 일생을 수녀로 살았다. 13m 높이의 안나 기념탑 꼭대기에는 성모상이 있다.

▲개선문

1740년 신성 로마제국의 카를 6세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자 상속녀가 된 큰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주변의 여러 나라 군주들이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 1748)’을 벌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적극적인 외교술로 1745년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황제에 즉위시키고 자신은 실질적인 황제로서 국정을 총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4, 딸 12명 등 모두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안나를 제외한 딸 11명을 모두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정략 결혼시켜서 오히려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크게 넓히고 역사상 가장 넓은 식민지를 보유했다.

▲안나 기념탑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 후 지나친 사치와 무분별한 생활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다. 또, 마리에 테레지아 거리에는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들 레오폴드의 결혼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Triumphal Arch)이 있는데, 개선문 신축공사를 하던 중에 남편 프란츠 슈테판 황제가 죽자 개선문의 북쪽에는 '죽음과 슬픔'을, 남쪽에는 '삶과 행복을' 주제로 한 조각을 각각 새겼다. 남편 프란츠 1세가 죽고 아들 요제프 2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그녀는 황제를 섭정하고자 했으나, 요제프 2세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마리아 테레지아에 관하여는 2017.03.24. 비엔나 쉔브른 궁전 참조).

▲안나기념탑의 성모 마리아

사실 산악 스포츠를 즐기려고 찾지 않는다면 대부분 스위스․독일․ 이탈리아로 가는 경유지에 불과한 인스부르크에서 하루 동안 합스부르크가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염되지 않은 빙하수를 상수도로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석회암 지대여서 상수도를 마시지 못하고 허드렛물로만 사용하고 있는데, 인스부르크는 유일하게 노르트 케네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빙하수를 직접 상수도로 공급하고 있어서 호텔에서도 수도꼭지를 틀어 빙하수를 그대로 마실 수 있었다.

또, 이렇게 맑고 깨끗한 빙하수를 원료로 한 맥주가 인스부르크의 자랑이다. 게다가 시내 중심을 흐르는 인 강은 알프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수로서 어른의 팔뚝만한 송어들이 떼를 지어 노는 모습은 인스부르크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송어는 한 사람이 하루에 2마리까지만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매일 송어를 잡아서 금방 씨가 말랐을 텐데도, 여유 있는 시민들의 마음이 엿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청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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