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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진계 대부 정희섭 작가

[리헌석의 예술계 산책] 충남 논산시 연산면 출신… 사진계의 전설

리헌석2017.06.14 08:42:09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하여 총무(사무총장?)을 지내고, 단체의 성격이 바뀔 때 초대 이사장을 지낸 정희섭 사진작가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출신이다. 충청권 사진작가들에게 물어도 이름조차 생소하게 여길 정도로 우리 지역에서는 이미 잊혀진 분이지만, 원로 사진가들에게는 한국 사진계의 전설로 추앙받는 분이다.

▲리헌석 전 대전문인협회장·문학평론가 겸 아트리뷰어

충청권 사진작가 1호인 신건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정희섭 선생을 추억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진계의 최고 원로라면 이해선 선생과 임응식 선생으로, 한국 사진계의 여명을 밝힌 분들이셨다.> <두 분을 비롯한 사진 1세대의 뒤를 이어 공모전에 입상하여 초대작가 1호가 된 분이 충남 논산시 출신인 정희섭 작가셨다.> <정희섭 선생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였기 때문에,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할 때, 그리고 여러 단체를 창립하거나 운영할 때 재정적 책임자와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이어 정희섭 선생의 예술적 공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이끌면서, 상업예술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사진 부문을 국전(國展)에 편입시켜 명실 공히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분이셨다.> <국전에 편입된 첫 번째 특선 수상자로 대전의 성재경씨가 결정되었고, 이로 인해 대전에도 예술사진 시대를 열어주신 분이셨다.> <성재경 선생은 성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자녀와 조카까지 사진계로 진출한 대전의 대표적인 사진 가족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정희섭 선생의 직간접적인 후광(後光) 효과였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자신(신건이 작가)과의 관계를 에둘러 밝혔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전이 막을 내리고, 예술 각 부문별로 공모전을 개최할 때도 정희섭 작가는 한국 사진계의 책임자 위치셨다.> <제1회 사진전에서 대전의 신건이(본인)가 특선을 하여 대전의 사진계 위상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셨다.> <이후 충남(대전, 세종, 충남) 사진작가 1호가 된 신건이 작가는 지역은 물론 전국 사진전 심사를 맡으며, 대전의 사진발전과 위상 정립에 진력하였다.> 등 자신을 비롯한 당대의 사진 예술가들에 대한 면면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광정(廣亭) 신건이 선생과 대담을 마친 후, 며칠이 지나 정희섭 선생의 아들 정규성 님이 충남 논산시 연산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조카 정규천 님이 선생의 뒤를 이어 사진작가로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규성 님과 소통을 하고 있는 동향(同鄕)의 아동문학가 김영수(대전문예대학 학장) 선생과의 인연으로 정희섭 작가의 유고사진집(한정판 400부) 『丁熙燮 寫眞集』을 구하여, 정희섭 선생이 사진계에 이바지한 공로를 어느 정도 가늠하게 되었다.

▲고 정희섭 작가(왼쪽)와 신익희 선생 운구(오른쪽).

1917년에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청동리 451번지에서 출생하신 정희섭 선생은 지학(志學, 청소년기)이던 1933년부터 사진수업을 시작하였다. 1948년에는 사진잡지 『사진문화』에 「영업사진가의 당면문제」(사진집에 수록되어 있음)를 기고하면서 사진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영업사진에 대한 현실적 문제를 다룬 글이지만, <민족이 없이 국가가 없고, 문화가 발전 없이 그 민족과 국가의 발전은 없을 것이니, 문화와 예술 부문의 일익을 짊어진 사진이야말로 평화시에도 중대역할을 할 것이다. 현하 건설 도중에 있는 우리나라는 한층 더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 발전은 긴밀히 요구될 것>이라고 사진 역할의 중요성을 밝혀 당시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 사진작가 1호
이어 1949년에 ‘조선사진문화사’와 ‘서울사진재료상’이 공동 주최한 제1회 전국종합사진대현상 모집전에서 특선 1석 1점, 준특선 3석 1점을 수상하여 대한민국 1호 사진작가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 외무부 주최의 제1회 관광사진 공모전에서 특선 1점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성가를 높였다. 1952년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전에서 특선 1점을 비롯하여, 국내외 공모전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입상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로 위상을 높였다.

6·25 직후 1회 개인전 개최
선생은 1953년 고향인 대전문화원에서 제1회 사진전(개인전)을 개최하여 충청권에 사진예술의 본보기다 되었다. 이어 서울의 명동 향원다방에서 사진전을 개최하였고, 1956년에는 서울의 미국공보원에서 ‘고적(古蹟) 채색사진전’을 개최하여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4년에 중앙공보관에서 ‘제3회 사진전’을 개최한 이후로는 개인전을 개최하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 활동과 국제적 사진단체 창립 등을 주관하고, 여러 지면에 사진 발전을 위한 칼럼을 기고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진계의 중요 보직 두루 맡아
1953년 한국사진예술가협회 총무 피선, 1954년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총무 피선, 1955년 전국사진가엽합회 회장 취임, 1958년 사단법인 대한사진가연합회 회장 취임, 1961년 한국사진협회 이사장 피선(1971년까지 연임), 1963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 1969년까지 4회 역임, 1964년 국전 사진부문 심사분과위원장(1971년까지), 1965년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 개설 및 교수, 1968년 아세아 사진예술단체 총연합회 국제회의 의장 겸 명예회장 등을 맡아 한국 사진 수준을 국제적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향년 55세를 일기로 별세
정희섭 선생은 1971년 12월 9일 서울 동대문구 면목1동 428~22에서 향년 55세로 별세하셨다. 선생의 영결식의 조사(弔辭)에서 김종양(金宗陽) 님은 <선생님께서는 원만하신 인격과 높으신 덕망, 그리고 원대하신 이념으로 오로지 우리나라 사단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 주셨나이다. 초창기의 우리나라 사단을 평생을 두고 알뜰히 가꿔주신 결과, 오늘날 우리나라 사단은 그 기틀이 잡혀 이제 중흥기에 들어섰으며, 또 아껴 길러내신 허다한 제자들이 이제는 우리나라 사단의 여러 분야에서 굳세게 활약하고 있나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사단을 해외로 진출시키는데 온갖 정열을 쏟아주셨으며, 그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 사단도 세계 속의 사단으로 성장하였나이다.>라고 공로를 밝히며 명복을 빌었다.

유고사진집 『丁熙燮 寫眞集』 발간
10여 년이 흐른 뒤, 아들 정규성씨와 사진계의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1983년 5월 30일 도서출판 光畵에서 유고사진집 『丁熙燮 寫眞集』을 발간하였다. 아들 정규성 님은 ‘이 책을 아버님 영전에 바칩니다’라는 후기(後記)에서 <평생을 사진과 함께 해오신 아버님의 작품을 모아 푸른 봄과 함께 세상에 내놓아 그 밝은 빛을 보게 하고자 마음에 간직한 것이 십수 년, 이제 이 유작 사진집을 내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한국사진작가협회, 대한직업사진가협회, 한국사진사연구소, 그리고 편찬위원 여러분과 특히 제자 되시는 박상록, 오종대씨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밝히면서 부친을 회상하고 있다.

님은 가셔도 예혼은 남아
충청권을 대표하는 사진계의 선구자 정희섭 선생, 대한민국의 사진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하신 사진작가 정희섭 선생, 우리나라의 사진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신 사진계의 대부 정희섭 선생, 그러나 선생은 55세의 아까운 나이에 소천하셨다. 선생이 소천하신 뒤 40여 년이 지났지만, 선생의 예술혼은 전설로 남아 있다. 마음 깊이 선생의 명복을 빌며, 선생의 예술혼을 이어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뒤를 이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이신 정희섭 선생을 추모하며, 앞으로 선생의 뒤를 따르는 예술가들의 향방을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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